정치판을 보고 있노라면 영화 `트루먼 쇼'의 주인공이 된듯한 느낌이 들 때가 많다. 태어날 때부터 거대한 몰래카메라의 세트안에서 길러지는 트루먼은 그 사실을 모르는 채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아간다.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24시간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다. 그에게는 `가상'이 곧 `현실'이다. 하지만 그를 훔쳐보는 시청자들은 그의 삶이 가짜라는 사실을 안다. 친구도, 이웃도, 심지어 부모와 처자식마저 배우에 불과하다.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진실을 알게 된 트루먼이 느꼈을 황당함과 분노는 공감하기 어렵지 않다. 대체 현실이란 무엇이며,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 것인가.
이른바 `안기부 선거자금 리스트'를 지켜보는 국민들의 심정은 착잡하다. 이 명단이 드러내 주는 과거의 진실은 과연 무엇이며, 명단이 우리 눈 앞에 펼쳐져 있는 오늘의 현실은 또한 얼마만큼 믿을 수 있는가. 자세히 들여다 볼수록 의혹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돈을 받은 정치인들은 이 자금의 출처를 정말 몰랐을까. 돈은 어떤 기준으로 분배됐을까. 총선뒤 선거비용을 신고할 때 이 돈은 어떻게 처리됐을까. 안기부는 선거과정에서 점잖게 돈만 대고 말았을까. 검찰출두를 거부하고 있는 당시 여당 중진은 그러고도 어떻게 상대방의 정치자금을 그토록 격렬하게 공격할 수 있었을까. 그렇다고 당시 야당 후보들은 깨끗한 정치자금만 가지고 선거를 치렀을까. 묘한 시점에 명단이 공개된 것은 단순히 `우연'일 뿐일까. 훗날 시간이 지나면 이 현실의 또다른 진실이 드러나고 공격자와 수비자의 위치가 뒤바뀌는 것은 아닐까. 이 의문점 투성이 명단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해 가장 바람직할까.
짐 캐리가 주연을 맡은 영화 `트루먼 쇼'는 번민하던 주인공이 거대한 세트를 박차고 나감으로써 막을 내린다. 이제부터라도 결코 거짓 삶을 살지는 않겠다는 단호한 선언이다. 우리도 정치판의 술수에 더이상 속아서는 안된다. 어렵고 힘든 일이겠지만 거대한 속임수의 고리를 어디에선가 끊어야 한다. 그것이 모두가 제대로 사는 길이다. <楊勳道(논설위원)>楊勳道(논설위원)>
트루먼 쇼
입력 2001-0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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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1-11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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