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와 6·15는 숫자가 비슷하다. 6=6, 2>1, 5=5로 6·15보다 숫자 하나
가 많은 게 6·25처럼 보이지만 6=6, 25>15의 날짜로 치면 10일이나 차이
가 난다. 이런 숫자의 구조가 엉뚱한 생각에 빠뜨린다. 즉 6·15는 마치 숫
자 하나 차이(2>1)로 6·25에 근접한 것 같지만 6·15의 감격과 기쁨으로 6
·25의 슬픔과 상처를 에끼고 치료하기에는 아직도 10일(25>15)이라는 큰
간격과 거리가 있다는 느낌 그것이다. 다시 말해 사망 56만1천, 과부 30
만, 고아 6만, 이산가족 1천만명에다 61만채의 집이 무너지고 2백8억달러
의 전비(戰費)를 날린 그 엄청난 6·25의 비극과 장장 51년간의 통한을 하
루 이틀의 6·15 악수와 너털웃음으로 덮고 어루만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차라리 6·15가 아닌 6·25의 지름길로 만나 6·25부터 말할 수 있었더라
면 어땠을까.
 '초연(硝煙)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
를 비목이여'의 그 깊은 계곡 비목(碑木)은 이미 오랜 비바람에 썩어갔고 '
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나온다/ 장미 냄새보다도 더 짙은 피의 향
기여'의 '죽어서 말하던' 국군의 피 향기도 뼈도 풍화한 지 오래건만 그 비
극 그 상처는 51년 세월 사무치게도 깊기만 하다. 결코 한반도의 '반도(半
島)'가 아닌 섬으로 끊어져 내린 남녘 산하에 아직도 뒹굴고 있는 녹슨 불
발탄을 보라. 어찌 6·25를 남의 전쟁에 비하랴. 미국의 같은 남북전쟁도
비교가 안된다. 6·25보다 많은 61만명이 사망했고 종전 이틀 뒤인 1865년
4월 링컨대통령을 잃었어도 무엇보다도 노예해방이라는 성과를 거두었고 마
가렛 미첼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도 얻을 수 있지 않았던가.
 앙드레 말로와 어네스트 헤밍웨이가 참전했고 후자의 소설 '누구를 위하
여 종은 울리나'와 피카소의 명화 '게르니카'를 낳은 스페인 내전은 어떤
가. 3백만이 죽은 베트남전도 6·25와는 상대적으로 다르다. 이 비극의 종
막은 언제 내려질 것인가.  <오동환(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