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11월 어느 날, 미국 UCLA병원의 마이클 코트리브박사는 한 환자를
진찰하다가 너무도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32세의 화가라는 이 환자의
목구멍은 온통 진균 감염으로 헐어 있는데다 지독한 폐렴증세를 보이고 있
었다. 피를 검사해 보니 면역체계도 모두 망가져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증세였다. 그리고 이듬해 6월 미국 질병관리센터(CDC)가 주보(週報)를 통
해 전 세계에 새 병의 출현을 알렸다. 의료진이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5
명의 남성 동성연애자들에게서 이름을 알 수 없는 치명적인 질병을 발견했
다고 보고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이를 주목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후천성 면역결핍증, 즉 에이즈로 불리는 이 질
병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전 세계 6천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감염시켰
고, 이중 2천200여만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문란한 성풍조 확산이 가장 큰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는 이 질병은 지난 84년 그 실체가 규명되긴 했다. 하
지만 예방백신도 치료제도 개발되지 못해 여전히 ‘인류에게 가해진 천형’
으로 자리잡고 있다.
현재 에이즈가 가장 극성을 부리는 곳은 아프리카로 총 인구의 15~36%가
이 병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에이즈는 이곳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맹
위를 떨쳐 하루에도 1만6천여명의 새로운 환자가 발생하고 있다. 이제 세
계 어느 곳이든 에이즈로부터 자유로운 지역은 없다. 아시아에만 해도 600
만명의 환자가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우리나라에선 지금까지 1천439명이 이 병에 걸렸고 316명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로선 비교적 감염률이 낮은 편이다. 그러나 연도별 상반기
중 감염자 수를 비교하면 98년 64명에서 99년 88명, 지난해 110명, 올해
159명으로 근년들어 상당히 빠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경각심을 촉구하
는 신호라 하겠다. 이런 터에 문란한 성풍속과 퇴폐 향락산업의 번창 등 에
이즈 번성을 부채질하는 조건들은 거의 다 갖추고 있다. 그래서 두렵다. 아
프리카의 상황이 언제까지나 남의 사정만은 아닐 것 같기에. <박건영(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