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 보수 덕에 국내에서 인기가 치솟고 있다는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
로(小泉純一郞) 총리. 그는 그런 인기를 타고 태평양전쟁 A급 전범들의 위
패가 있는 야스쿠니 신사까지 참배하는 등 사뭇 득의양양 했었다. 하지만
요즘은 꽤나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하기야 국내 인기야 어떻
든 주변국 사이에선 아무리 화해 친선의 제스처를 써도 어느 한 곳 덥석 손
을 잡아주는 곳이 없으니 그럴만도 하다.
 처음 고이즈미 총리는 한국에 손을 내밀었었다. 다음 달 뉴욕서 열리는
유엔아동특별회의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추진했던 것이다. 그러
나 한국측의 냉담한 반응에 머쓱해진 그는 뉴욕행을 포기하고 동남아시아
국가 순방으로 선회했다. 그리고 10월 20일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열리는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 이전 한국과 중국을 방문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며칠 전엔 외무부에 사전준비에 착수하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하
지만 이 역시 한·중 양국의 시큰둥한 반응에 부딪혀 속앓이를 하고 있는
형편이다.
 한국은 ‘역사교과서 왜곡 및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에 대한 일본의 성의
있는 조치가 없는 한 그의 방한이나 한일 정상회담은 성사되기 어렵다’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 했다. 중국 역시 ‘일본이 과거 역사문제와 관련해 예
전에 약속한 조치를 이행하고, 그 자세를 존중하고 있다는 점을 행동으로
보여주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고이즈미의 악수 제의를 속없이 흐물흐물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뜻이다.
 한 나라의 총리가 방문이나 정상회담을 요구할 때, 상대국에서 마뜩찮아
하고 심지어 은근한 거절의 뜻까지 내비치는 경우는 국제관례상 극히 드물
다. 하지만 상대국들과의 관계훼손 사고들을 거침없이 저질러 놓은 후, 아
무런 해명이나 사과도 없이 일방적으로 화해하잔다고 선뜻 응할 나라 또한
거의 없다. 고이즈미가 저능(低能)이 아니라면 이를 결코 모를 리 없을 것
이다. 그런데도 이에 대해선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없이 무작정 구걸 외교
에만 정신을 쏟고 있다. 모르긴 몰라도 고이즈미란 인물의 얼굴도 무척이
나 두꺼운 모양이다. <박건영(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