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 척결에 대한 청사진을 마련할 것이다.” 세계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남아공 더반에서 열렸던 ‘유엔 인종차별철폐회의’가 막을
내렸다. 당초 일정보다 하루를 더 연장하면서까지 설전을 벌인끝에 최종 선
언문도 채택했다. 그리고 이 선언문은 ‘노예거래가 중대범죄’임을 분명
히 하고, 나아가 피해자에 대한 국제사회의 ‘도덕적 책무’가 있음을 확인
한데서 상당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 참가국 대표들이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평가와 존중이 이뤄져야 한다’는 대원칙을 확인하
고, 국제사회가 각각의 사법체계 안에서 인종차별주의에 대응할 것을 촉구
한 대목도 눈여겨 볼 대목이라고 한다. 역시 난산 끝에 나온 보람이 있기
는 있는 모양이다.
 하기야 노예제를 운영했던 미국이 철수하고, 식민지를 경영하던 유럽권
과 아프리카 대표들 간에 첨예한 대립이 있었음에도, 이정도나마 명문화됐
다는 것이 분명 큰 성과이긴 하다. 일단은 이 것만으로도 노예거래의 재발
방지 및 예방을 위한 국제사회의 확고한 의지가 천명된 것으로 파악할 수
도 있겠기 때문이다. 특히 인종차별주의에 맞서기 위한 세부 실천사항까지
담고 있는 등 국제사회의 양심적 실천을 강조한 내용은 가위 ‘역사적인
일’로 받아들여질만 하다 하겠다.
 그런데도 일부에선 ‘알맹이 없는 빈 껍데기’만 늘어놓았다는 혹평도 만
만찮게 나오고 있다. 정작 중요한 ‘노예제도에 대한 사과와 배상’은 슬그
머니 자취를 감춘 채 대신 ‘범죄규정’이라는 식의 겉치레 수사(修辭)로
만 그득 메워졌다는 것이다. 충분히 제기됨직한 지적이긴 하다. 수세기 동
안 백인들에 의한 노예매매 인종차별 식민지 지배에 시달려온 아시아 아프
리카 등지의 유색인들로선 결코 이정도로 만족할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한편으론 유색인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점이 있지 않나 싶기
도 하다. 미국 및 유럽인들, 다시 말해 백인들의 뿌리깊은 우월의식을 지나
치게 가볍게 본 건 아니었나 하는 점이다. 수백년 맛들였던 노예무역과 식
민지 지배의 추억을 그들이 결코 하루 아침에 떨쳐버릴 리는 없었을텐데도
말이다. <박건영(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