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인 1993년, 당시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찾아왔다. 부랴부랴 달려온듯한 그의 손에는 100여년 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외규장각 고문서 수백책 중 한권이 들려 있었다. 그는 그것을 보여주며 금방이라도 약탈도서 모두를 돌려줄듯한 태도를 보였다. 뜻밖이었지만 거기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우리 정부가 한참 추진중이던 고속전철 사업에 자기네의 테제베(TGV)를 수출하려는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대통령이 직접 나선 로비전이었다.
미테랑의 로비가 주효했는지 어떤지는 몰라도 여하튼 테제베 수주가 결정돼 일단 그의 목적이 달성되긴 했다. 하지만 외규장각 고문서는 수년이 지나도록 감감소식이고, 몇차례 형식적인 협상만 지루하게 이어졌을 뿐이다. 그렇다고 미테랑만 탓할 처지도 아닌 것이, 거액의 수주를 따내자면 으레 로비전이 벌어지게 마련이고 또 가끔은 달콤한 미끼도 끼어들 수 있겠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너무 쉽게 넘어간 것 같아 퍽 상쾌하진 않다.
내년 3월께 기종이 선정될 것으로 보이는 우리나라 차세대 전투기 구매사업에 벌써부터 내로라하는 무기 수출국가들의 로비전이 한창이다. 하기야 4조1천억원대의 엄청난 거액 사업이니 누군들 구미가 당기지 않으랴. 프랑스 러시아 등 저마다 갖가지 이점들을 내세우며 우리 정부의 환심을 사기에 여념들이 없다.
그런데 어떤 눈치도 보지 않으며 자신만만한 국가가 하나 있다. 바로 미국이다. 그들은 국방장관 등 고위층들의 입을 빌려 점잖게 이런 귀띔만 흘리고 있을 뿐이다. “무기체계의 호환성을 의미하는 한·미 연합전력의 상호 운용성이 매우 중요하다.” 한·미 안보관계의 특수성을 고려해서라도 미국 기종을 선정해야 한다는 은근한 압력 같이만 들린다. 하긴 미국과의 특수관계로 인해 거의 맹목적으로 미제 무기만 구매해야 했던 시절도 없지 않으니, 어쩌면 예견된 강요인지도 모르겠다.
그나 저나 환심성 로비에 무작정 흔들려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부당한 압력에 굴복할 수도 없고, 이래 저래 우리 정부의 선택만 어렵게 생겼다. <박건영 (논설위원)>박건영>
로비와 압력
입력 2001-11-22 00:00
지면 아이콘
지면
ⓘ
2001-11-22 0면
-
글자크기 설정
글자크기 설정 시 다른 기사의 본문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가
- 가
- 가
- 가
-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