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할머니가 바구니에 돈을 가득 담고 장을 보러 가던 길이었다. 도중에 길가에 앉아 잠시 쉬고 다시 일어나려는데 옆에 두었던 바구니가 보이지 않았다. 깜짝 놀라 주위를 살펴보니 돈은 한 옆에 수북이 쌓여 있는데 바구니만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패전국 독일에서 겪었던 극심한 인플레이션 상황을 전한 일화다. 물가가 터무니없이 올라 휴지조각처럼 돼버린 돈더미 보다 실물인 바구니가 훨씬 소중히 여겨졌던 실상을 자못 현실감 있게 전해준다. 당시 독일은 전후 배상문제 등이 얽혀 마르크화를 남발한 결과 엄청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었다. 얼마나 극심했으면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중에도 음식값이 계속 치솟아 식사를 다 마쳤을 땐 이미 두배 세배 값이 올라 있더라는 이야기도 있다.
한 시중은행이 지난 11월 한달간 동전교환에 수수료를 물리다가 고객들 반발이 심해지자 이달 1일부터 수수료 징수를 백지화했다고 한다. 다소 어처구니없어 보이지만 갈수록 화폐가치가 떨어지는 상황이니 저액권인 동전이 푸대접 받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미 1원짜리 5원짜리 동전이 사라진 건 옛날이고, 50원짜리 100원짜리 심지어 500원짜리마저 천덕꾸러기 신세이긴 매한가지다. 동전만으론 무엇하나 살 물건도 별로 없고, 기껏해야 공중전화를 걸거나 시내버스를 탈 때 등에나 쓰임새가 있을 정도니 더 말해 무엇하랴.
그런데 이젠 홀대받는 게 동전만이 아닌 모양이다. 얼마 전 한 버스회사가 승객들로부터 받은 1천원권 지폐 상당액을 들고 거래은행을 찾았다가 망신만 당했다고 한다. 취급부담이 크다는 이유로 수납을 거부당했던 것이다. 마침내 1천원권 지폐마저 천덕꾸러기가 되었음을 일깨워준다. 하기야 요즘은 1만원권 지폐가 잔돈 취급을 받고, 10만원권 지폐를 발행하자는 주장까지 나오는 상황이긴 하다. 굳이 은행만 탓할 처지도 아닐듯 싶다.
그나 저나 이렇게 자꾸 화폐가치가 떨어진다면 우리도 ‘돈더미 보다 바구니를 먼저 챙기는 상황’이 오지 않을까 지레 겁이 난다. 지나친 노파심일지 모르지만. <박건영 (논설위원)>박건영>
돈더미와 바구니
입력 2001-12-06 00:00
지면 아이콘
지면
ⓘ
2001-12-06 0면
-
글자크기 설정
글자크기 설정 시 다른 기사의 본문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가
- 가
- 가
- 가
-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