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의 카이로에서 비행기로 한시간반쯤 걸리는 남쪽에 룩소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는 기원전 3천∼4천년전 왕족들의 묘 수백기가 즐비하다. 이근처 크루나라는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은 또 그 아들에게 분묘 도굴 수법을 전수해가며 대대로 왕묘의 부장품을 훔쳐 팔아가며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1881년 한 미국인이 이집트를 여행하면서 구입한 파피루스지(紙)를 본 고고학자들이 이 종이가 고대 이집트왕의 묘에서 나온 부장품임을 밝혀냄으로써 알려졌다. 당시 조사결과 3천년전에 왕들의 미라를 도굴꾼들로부터 지키기 위해 여러곳에 흩어져 있는 40구의 미라를 옮겨 엄청난 부장품과 함께 비밀의 묘지를 조성했는데 한 도굴꾼이 이를 발견, 자손 대대로 도굴 수법을 가르치며 이곳의 부장품을 팔아 생활해왔음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지금 이곳은 이집트 당국에 의해 엄격히 관리되고 있다.
최근 도내 고양시에 있는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의 능이 도굴 됐다고 한다. 공양왕은 이성계 장군이 위화도 회군에 성공한후 우왕을 처형하고 그 아들 창왕을 폐한 다음 내세운 왕(王)씨 가문의 정창군이다. 이성계와는 사돈지간이다. 그는 시골에서 유유자적하며 생활을 즐기다 끝까지 왕위에 오르려 하지 않았으나 이성계의 위세에 눌려 어쩔 수없이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후에도 불안과 공포의 나날을 보내던 그는 목숨이라도 건지고자 이성계와 동맹을 맺기로 하고 이성계의 집으로 행차에 나선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왕이 정신을 잃어 임금의 도리를 않고 있으니 폐위 시켜야 한다'는 왕 대비의 교서를 받고 눈물을 흘리며 임금의 자리에서 쫓겨 난다. 1392년의 일이다.
70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의 능이 도굴됨으로써 후세의 인간들에 의해 또 한번 수모를 겪은 셈이다. 유물은 당시 역사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유물은 훼손돼선 안되고 도난 도굴은 더더욱이 안된다. 경기도는 서울과 인접한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고려 조선조의 왕릉이 많은 곳이다. 고분과 문화재 도굴에 대한 근본 대책은 없는 것일까. <성정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