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섬마을이나 어촌엔 기일(忌日)이 같은 아버지 남편 아들 등을 둔 가정이 적지 않았다. 남정네들이 몇척의 배에 나눠타고 고기잡이에 나섰다가 거센 풍랑을 만나 한꺼번에 수장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기일이 반드시 정확하다고만은 할 수 없다. 비록 같이 풍랑을 만났다 해도 더러는 며칠씩 물위를 떠다니다 숨을 거둔 경우도 있겠기 때문이다. 그래도 굳이 그런 일까지 일일이 따지는 유족은 드물었다. 어느 날 풍랑이 심하게 일었으면 으레 그날을 어림잡아 기일로 삼는 게 고작이었다.
그들은 그래도 거의 비슷한 시기를 기일로 잡을 수는 있었다. 반면 많은 남북한 이산가족들은 부모 형제의 기일을 비슷하게 잡을 수 조차 없다. 기껏해야 고인의 생일 등을 임시 기일로 삼을 수 있을 정도다. 반세기 넘게 헤어져 살다보니 생사여부를 확인할 길 없어, 나이가 많으면 고인이 된 것으로 지레짐작하고 제사를 지낼 뿐이다.
그런데 정확한 기일을 충분히 알 수 있었음에도 엉뚱한 날 제사를 지낼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있다. 일제강점기하 징용 징병자 가족 상당수가 그랬다. 일본 정부로부터 우리 정부가 넘겨받은 징용 징병자 37만여명의 기록이 유족 등에게 전혀 통보되지 않은 채 길게는 30년 넘게 기록보존소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71년부터 93년까지 네차례에 걸쳐 넘겨받은 문서가 분류조차 되지 않은 채 방치돼 있었던 것이다. 특히 71년 넘겨받은 ‘군인 군속 전사자 명부’에는 2만여명의 이름과 본적지 주소 사망일시와 장소까지 적혀 있다고 한다. 정부의 기록보존과 관리 수준을 미루어 짐작케 해준다.
기록보존 담당자들은 “창씨개명된 성이 적혀 있고 알아보기 힘든 글씨가 많았다” “본적지와 주소가 현재와 달라 일일이 연락하는 게 불가능했다”고 변명한다. 일본어를 아는 이들이 그렇게도 없었는지, 또 옛 본적지 주소 추적이 그토록 어려웠는지 모르겠지만, 누대의 정부가 손도 대지 않은 채 묵혀온 이유치곤 꽤나 궁핍해 보인다. 수없이 강조해온 정보화사회와는 너무도 걸맞지 않기에 더욱 그렇다. <박건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