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피로 약속했고 보혈(寶血)로 언약했다. 약속을 저버리는 사람은 기독교 신자가 될 수 없다. 옛 중국인들도 약속을 하고 조약을 맺을 때 피를 마셨다. '계구마지혈(鷄狗馬之血)'이라고 해서 천자(天子)는 소나 말의 피를 마시며 조약을 엄수할 것을 맹세했고 제후(諸侯)는 개나 돼지 피를 마시며 언약을 했는가 하면 대부(大夫) 이하는 닭의 피를 들이켜며 맹약을 했다. 그 피의 총칭이 '사기(史記)'에 나온다. 또 피를 마시는 대신 혈판(血判)을 찍어 굳게 약속하기도 했다.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써 손도장을 찍는 게 혈판을 찍는 것이다. 그런 약속을 '피의 맹세' 즉 '혈맹(血盟)'이라고 한다.
선인들이 그렇게 피의 약속을 했던 까닭은 무엇인가. 약속이란 그만큼 중요하고 서약과 맹세란 그만큼 어려우며 위약과 파약은 그만큼 무섭기 때문이다. 흔히 장부의 한 마디를 '중천금'이라고 했다. 돈으로 치면 천금처럼 무겁다는 뜻이다. 천금이 얼마인가. 엽전 천냥이다. '일확천금'이라고 할 때의 그 천금이다. 또 사나이의 한 마디를 시효(時效)로 치면 '천년불개(千年不改)'라고 했다. 천년 동안 고칠 수 없는 게 장부의 한 마디요 약속이라는 뜻이다. 더구나 한 단체와 단체의 약속, 한 나라와 나라의 약속이란 말할 것도 없다. 1972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과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맺은 탄도탄 요격 미사일(anti-ballistic missile) 협정이란 어떤 약속인가. 그것은 군비 확장 억제를 위한 세계 양극(兩極) 세력, 지구의 절반씩을 맡은 두 대표 국가 간의 막대하고도 막중한 약속이었다.
그런데 '천년불개'의 '중천금'을 넘어 '만년불개(萬年不改)'의 '중만금(重萬金)'이 돼야 할 그 거창한 약속을 부시 미국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파기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즉각 “그것은 실수”라고 단언했다. “황당한 결정”이라고 맹공을 퍼부은 '뉴욕타임스'의 사설을 비롯한 미국 지식층의 반대는 더 거세다. 부시측의 섣부른 약속 파기가 무모한 군비 경쟁을 촉발하지나 않을까 염려스럽다. <吳東煥 (논설위원)>吳東煥>
ABM 파기
입력 2001-1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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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2-16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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