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가 여우를 잡아 먹으려 하자 여우가 말했다. “천제(天帝)께서 여우를 짐승들의 왕으로 정했으니 나를 잡아 먹으면 천제의 명령을 어긴 것이다. 내말이 거짓이라면 내뒤를 한번 따라 와 봐라. 모두 나를 보고 도망칠 것이다.” 그래서 호랑이는 여우를 따라 가 봤더니 과연 모든 짐승들이 겁에 질려 꽁무니를 빼는 것이었다. 그러자 호랑이는 “과연 네말이 맞구나” 하면서 여우를 놓아 주었다. 그런데 짐승들이 두려워 한 것은 정작 여우가 아니라 그 뒤를 따라오는 호랑이라는 것을 호랑이 자신은 모르고 있었다.
이러한 우화는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 선왕이 북방에 있는 나라들이 모두 초의 재상 소혜휼을 두려워 한다고 하자 시중을 들던 강을(江乙)이라는 사람이 선왕에게 들려준 얘기다. 북방나라들이 두려워 한 것은 소혜휼이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초나라와 선왕의 강한 군대 때문이라는 얘기를 비유해서 한 말이다.
우리 사회는 예나 지금이나 이러한 여우의 꾀에 속아 일을 그르치는 일이 너무 잦다. 고위 고관들의 부인이나 비서, 그 주위인물들이 마치 자신들이 고위 고관인양 행세를 해도 통하는 사회다. 역대 정권마다 자주 일어났던 과거의 일들을 꺼낼 필요도 없이 최근의 진승현(陳承鉉)게이트의 정치 브로커가 그렇고 신동아그룹 회장 부인이나 전 아태재단 간부의 행태가 그렇다. 특히 진승현 게이트와 관련, 돈심부름을 했다는 최택곤씨는 여권실세들을 줄줄이 꿰는 화술을 바탕으로 막대한 로비자금을 받아 뿌리고 다녔는데도 처음 조사에서 이를 캐내지 못했다니 더욱 혼란스럽다.
이와 관련 여야 모두가 철저한 수사와 진 리스트의 공개를 촉구하면서 정보채널을 총동원, 돈 받은 정치인의 명단 파악에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 것이 우습기도 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권이 주장하는 리스트의 공개보다는 사태에 대한 검찰의 철저한 수사다. 중국 촉나라의 옛군주였던 유장(劉章)이 우유부단한 나머지 잘못한 사람에 대해 이를 따지지 않고 어물쩍하게 정치를 하다 신하와 국민들 모두가 타락, 나라를 잃은 중국고사도 있다. 검찰의 여야, 지위고하 없는 철저한 수사와 처벌만이 지금의 어지러움을 정리하는 길이다. <성정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