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11대왕 중종 때 일이다.
권력을 둘러싸고 서로 할퀴고 뜯던 윤임 김안로 남곤 심정 홍경주 등 조정 중신들이 모처럼 뜻을 합쳤다. 그들 공통의 적으로 떠오른 중전 문정왕후를 제거키로 모의한 것이다. 그들은 우선 한 거상(巨商)으로부터 빼앗은 치부책(뇌물장부)을 근거로 중전의 오라비들이 거액을 수뢰했다고 참소한다. 그리고 국문을 통해 역모(逆謀)자금을 마련코자 뇌물을 챙겼음을 억지 토설받으려 한다. 일은 뜻대로 잘 풀려 드디어 중전을 폐출위기로까지 몰고간다. 그러나 전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일거에 틀어지고 말았다. 김안로의 수중에 있던 거상의 치부책이 우여곡절 끝에 중전과 세자를 거쳐 왕에게 바쳐졌고, 왕이 이를 들춰본 결과 중전의 오라비들을 음해한 중신들이 되레 더 엄청난 뇌물을 챙겼음이 드러난 것이다.’
요즘 한창 시청자들의 인기를 모으고 있는 모TV 주말사극에서 한달여전 다뤄진 내용이다. 사실 여부야 어떻든 손에 땀을 쥐게하는 긴박감과 예상밖 대역전으로 많은 시청자들을 사로 잡았다.
뇌물만큼 달콤한 유혹도 없다. 받는 사람은 힘 안들이고 치부할 수 있어 좋고, 주는 이 역시 뇌물 한 두번으로 아무리 어려운 일도 쉽게 해결할 수 있다. 그래서 어느 시대 어느 사회이고 소위 실력자 권력자 주변엔 항상 뇌물이 꾀이게 마련이다. 물론 뇌물이 사회의 원칙을 무너뜨리고 부패의 구렁텅이로 빠트리는 첩경이란 걸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뇌물이 통하지 않는 사회, 깨끗한 사회를 추구하고 표방하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하지만 좀처럼 근절하기 어려운 것 또한 뇌물임은 새삼 거론할 나위도 없다.
나라가 온통 무슨 무슨 게이트, 무슨 무슨 리스트, 설(說) 등으로 시끌벅적하다. 곳곳에서 돈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 하도 여러가지가 얽히고 설키다 보니 조선조 중종 때의 ‘치부책 소동’ 따윈 아예 명함도 못내밀듯 싶다. 물론 아직은 의혹들일 뿐이라지만, 사회가 정작 맑고 깨끗했다면 이런 의혹들인들 감히 발을 붙일 수 있었을까. 그간 유난히도 드높였던 ‘개혁’ 소리가 차라리 쑥스럽다. <박건영 (논설위원)>박건영>
쑥스럽다
입력 2001-12-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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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2-20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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