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공업화 근대화가 채 이루어지지 못해 농사만이 거의 유일한 생산수단이었던 시절, 남의 땅을 소작해 연명해야 했던 작인들에게 지주(地主)는 항상 어렵고 두려운 존재였다. 자칫 밉보이면 삶의 터전인 소작지를 빼앗길 수도 있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더 무서운 건 지주를 대신해 소작지를 관리 감독하던 마름들이었다 한다. 대부분 이들이 소작료를 결정하고 징수했으므로 그 위세를 믿고 부리는 횡포 또한 대단했던듯 싶다. 툭하면 작인들을 불러다 종처럼 부렸고 술대접을 받거나 선물을 강요하는 일도 다반사였다고 한다.
마름 정도만 돼도 분수 모르고 위세 부리던 상황은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진 것도 없는 모양이다. 갖가지 권력형 비리를 포함, 권력층을 사칭한 사기 횡령 등이 끊이지 않는 걸 보면 되레 더 기승을 부린다는 느낌마저 준다. 조그만 힘만 주어져도 그 힘을 주체못해 아무 때 아무 곳에서나 천방지축 휘둘러대고 싶은 게 어쩌면 별반 내세울 것 없는 보통사람들의 인지상정(人之常情)인지도 모르겠다.
미국 하원 최다선(23선)의원인 존 딩얼(73)의원의 처신이 사뭇 화제가 되고 있다. 며칠 전 그는 워싱턴 레이건공항에서 속옷 차림으로 보안검색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일의 발단은 20년 전 말에서 떨어져 부상했을 때 몸에 이식한 강철 고관절이 금속 탐지기에 걸려 경보음을 낸데서 비롯됐다. 딩얼의원은 외투와 양복상의 신발 그리고 양말까지 벗은 후 다시 탐지기를 지나가야 했지만 또 소리가 났다. 그러자 보안요원들은 그에게 바지까지 벗게 했다. 그런데도 그는 끝내 자신이 고위 정치인이란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단지 뒤에 자신이 다른 사람(일반인)과 똑같은 대우를 받았는지를 알고 싶어 교통장관에게 확인전화를 걸었을 뿐이다.
비록 일부라지만 남다른 지위나 권세께나 있다 하면 웬만한 불법쯤은 앞장서서 저지르는 이들. 심지어 명절 때 도로가 조금 막힌다고 경찰차까지 앞세워 반대 차선을 신나게 달리던 이들. 그들은 이 일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지 자못 궁금하다. 뒤늦게나마 본받는 시늉이라도 내려는지. <박건영 (논설위원)>박건영>
시늉이라도
입력 2002-01-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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