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대학시절 성적도 나빴고 무엇인가 하려는 의욕도 없었다고 했어요. 이말은 그가 요령을 부릴 줄 모르는 사람이란 걸 감안하면 정말 신통치 않은 그저 그런 학생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흑인인 워싱턴 포스트지의 윌리엄즈 기자가 91년 2월 걸프전의 영웅 콜린 파월에 대해 설명한 내용중 일부이다. 그는 같은 흑인으로서 콜린 파월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측근으로 알려져 있다. 자메이카 출신 이민자의 아들로 1937년 뉴욕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뉴욕 시립대 학군단(ROTC)장교로 임관한 뒤 63년 베트남전 참전, 74년 주한미군2사단 대대장으로 동두천에서 근무, 91년 걸프전 영웅, 지금은 흑인 최초의 미국무장관인 콜린 파월의 학생시절 모습이다.
“ROTC 시절에도 파월은 수업시간이나 그후에도 전혀 눈에 띄지 않는 학생이었어요.” 이는 ROTC 동기인 케네스 몽고메리씨의 회고라고 한다. 윌리엄즈기자는 그래서 콜린 파월을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것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로 성격을 규정했다. 상관보다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않고 하극상을 통한 야망을 갖지 않는 것과 같은 군인으로서 요구되는 그런 확실한 인간상이라는 것이다. 윌리엄즈 기자는 워싱턴 포스트에 쓴 파월에 관한 기사에서 '기골과 성실성을 갖추고 정치적 편향성이 없는 노력가'라고 그의 성격을 압축했다.
파월은 그의 회고록에서 73년 봄, 주한미군 근무명령을 받았을 때를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웠을 때로 기억하고 있다. 아내와 3자녀 등 가족과 떨어져 단신 부임해야하는 한국근무 특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74년 1년을 한국서 보내고 귀국할 때는 '한국서 새로운 군대를 창조해낸 지도자가 됐다'는 긍지와 함께 군경력중 가장 행복한 한해였다고 술회할 정도로 변해 있었다.
콜린 파월. 그는 지금 미 국무장관으로서 한반도 정책과 관련, 북한에 대한 강공의 가운데에 서있다. “북한국민은 악이 아니지만 정부는 악의 축이다. 악의 축이란 것은 군사개입이나 포용정책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북한과의 대화의 문은 계속 열어놓고 있다. 그의 '눈에 띄지 않는 두각'이 한반도 정책에서는 어떻게 나타날지 주목된다. <成定洪(논설위원)>成定洪(논설위원)>
콜린 파월
입력 2002-02-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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