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섬 '송도(松島)'처럼 친근감 넘치는 섬 이름도 드물다. 그래선가 '송도'는 부산을 비롯해 충남 보령, 경남 의창, 전남 여천에도 있고 경남 통영과 전남 신안에는 각각 두 군데나 있다. 아예 '소나무 도시(松都)'도 있었다. 그러나 인천 송도처럼 격랑 드센 우리 근세사의 표면과 측면을 주시해온 섬도 다시 없을 것이다.
일찍이 백제 시조 온조(溫祚)의 형인 비류(沸流)가 인천에 정착, 최초의 지명을 '미추홀(彌鄒忽)'이라 한 뒤 백성들로부터의 구심력이 떨어지자 자살하는 모습부터 '송도'는 지켜봤고 고구려 영토 '매소홀현(買召忽縣)'이 됐을 때도 송도는 거기 있었다. 그 뒤에도 통일신라 때 소성(邵城)→고려 때 수주(樹州)→경원군(慶源郡)→인주(仁州)→경원부(慶源府)→조선 때 인주(仁州)로 환원됐다가 태종 때(1413년)에야 드디어 '인천군'이 된 명칭 변천사와 송도는 함께 했다. 파도 가파른 근세사의 송도는 어땠는가. 1882년 조미(朝·美)수호조약 체결, 독일인 묄렌도르프 등 양코배기들의 공식입국과 함께 1883년 1월1일 인천항 개항으로 뿌려진 이 땅의 개화문명 씨앗을 송도는 목격했고 그 개화의 관문으로 드나들던 유길준(兪吉濬) 김옥균(金玉均) 등 선각자들에게 송도의 소나무는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아펜젤러, 알렌 등 개화사 주연급이 들어올 때도 어서 오라 했고 1884년 갑신정변에 실패, 망명길에 오르는 김옥균, 박영효(朴泳孝) 등의 쓸쓸한 그림자에도 송도의 소나무는 하염없는 눈물을 뿌렸다.
그뿐인가. 1900년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 준공 때 한껏 들떴던 송도의 소나무는 1903년 첫 하와이 이민 출항 뱃고동에 마냥 울었다. 일제 때 월미도가 국방 요새가 되면서 유원지로 개발된 뒤에도 1950년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 때나 92년 영종도 국제공항 착공 때도 크게 박수를 보낸 송도의 소나무였다. 그런 인천 송도가 해상신도시로 착공(94년)돼 미디어밸리 조성 지역으로 선정됐고 엊그제 16조원의 외자(미 G&W社) 유치까지 성공, 피치를 올리게 됐다는 건 얼마나 고무적인 일인가. <吳東煥(논설위원)>吳東煥(논설위원)>
송도 신도시
입력 2002-03-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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