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식이 건강에 좋다”는 구호 아래 국수 빵 등 밀가루 음식 먹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쳤던 시절이 있었다. 또한 보리 콩 등이 섞인 잡곡밥도 적극 권장, 심지어 학교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도시락을 검사, 흰 쌀밥을 싸오는 아이들을 혼내주던 때도 있었다. 모두가 주식인 쌀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숱한 세월 전통처럼 이어져온 이른바 ‘보릿고개’ 고통은 좀처럼 사라질 줄을 몰랐다.
근근한 살림에 겨울과 봄을 나는 사이 식량은 거의 바닥나고, 오직 보리 여물기만 기다리며 주린 배를 달래야 했던 시절. 이 보릿고개의 고통이 사라진 것은 불과 30년 전인 70년대 초부터 ‘통일벼’ 대량재배로 쌀 수확량이 크게 늘어나면서였다. 통일벼는 대단한 다수확 품종의 벼로 당시 정부가 정책적으로 개발한 벼였다. 훅 불면 밥알이 날아갈 정도로 풀기가 없고 맛이 떨어졌지만, 이 통일벼 덕에 비로소 우리 국민은 기아에서 해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후 국민들이 어느 정도 허기를 면하게 되자 그때부턴 “통일벼는 맛이 없다”는 소리가 나오게끔 되었고, 결국 기아해방에 공이 컸던 통일벼는 지난 84년 이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러는 사이 우리의 음식문화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 햄버거 피자 등 소위 패스트푸드가 어느틈에 청소년들 사이에선 거의 주식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당연히 쌀 소비량이 크게 줄었고 연속 풍년까지 겹치면서 급기야는 남아도는 쌀이 오히려 골칫거리인 세상이 되었다.
현재 국내 쌀 재고량은 자그마치 989만석이나 된다. 이는 세계식량기구(FAO)가 권장하는 적정량인 560만~600만석의 1.5배가 넘는 물량이다. 그래서 큰 걱정이라고 한다. 넘치는 쌀을 그냥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언제까지 쌓아만 놓고 썩혀서도 안되고. 생각다 못해 정부에선 재고 쌀 일부를 가축 사료용으로 활용할 모양이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일테지만, 왠지 썩 개운치를 못하다. 보릿고개의 고통이 바로 엊그제만 같아서일까, 아니면 ‘쌀 한톨이 농민의 피 한방울’이라던 옛 어른들 말씀이 좀체 잊혀지지 않아서일까. <박건영 (논설위원)>박건영>
넘치는 쌀
입력 2002-04-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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