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지드의 소설 '법왕청(교황청)의 지하도'를 보면 주인공 라프카디오의 살인 장면이 나온다. “천천히 열둘을 셀 때까지 벌판에 불이 보이지 않으면 이 자의 목숨은 살아나는 거야. 하나 둘 셋 넷… 아홉 열. 불이 보인다.” 다음 순간 그는 황량한 벌판을 달리는 야간열차 옆 좌석 손님을 열차 밖으로 떼밀어 살해한다. 이른바 '동기 없는 살인'이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동기 날조(急造) 살인'이고 심리학에서 일컫는 정신병적인 심심풀이 '유희(遊戱) 살인'이다. 어이없는 살인 장면은 93년 7월 들어왔던 찰튼 헤스턴 주연의 영화 '2분 경고(Two Minute Warning)'도 마찬가지다. 망원렌즈가 달린 고성능 소음(消音) 장총을 호텔 창틀에 걸어 놓고 미식 축구 결승을 보러 온 대형 경기장의 9만여 관중을 향해 닥치는 대로 조준 사격을 해대는 것이다.
실제 유희 살인도 흔하다. 85년 10월 이탈리아 여객선 아킬레라우로호를 납치한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 분자들은 여권 제비뽑기에 의한 당첨자를 차례로 바다에 던졌고 그해 11월 이집트항공 보잉737기 납치범들은 똑같은 수법으로 당첨자를 비행기 밖으로 걷어찼다. 지상 역시 위험하다. 93년 10월17일 도쿄 시내를 조깅하던 33세의 여자 회사원(小澤泰子)은 돌연 어디선가 날아온 쇠 화살을 등에 맞고 쓰러졌고 94년 7월 2일 오사카 지하철역에서는 65세 할머니가 18세 소년에게 떼밀려 전동차에 치고 말았다. 퇴근길 전차에서 40대 흑인 남자가 총을 난사, 5명이 죽고 임산부를 포함한 17명이 중경상을 입은 93년 12월 뉴욕 교외 사건과 같은 총기 난사사건은 요즘 또 얼마나 잦은가.
94년 지존파 일당의 5명 살인 동기는 부자에 대한 적개심이었고 96년 막가파의 생매장 만행은 사회에 대한 증오심 때문이었다지만 그들을 뺨치는 살인마가 19명을 죽였다는 이번 군포 살인 방화사건의 4인조 흉악범들이다.
단돈 몇 푼에 무작위로 유희 살인을 했다지 않은가. 모두가 '경제 경제 또 경제 제일주의'와 황금만능 사고가 깔아뭉갠 인간성 말살과 가치 전도의 무서운 결과가 아닐 수 없다. <吳東煥(논설위원)>吳東煥(논설위원)>
유희 살인
입력 2002-04-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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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4-28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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