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영국의 전 수상 앤토니 이든경이 외상으로 재임했을 때의 얘기다. 그는 한국전쟁 및 인도차이나 전쟁종결과 전후문제를 다루는 제네바 회의에 참석중이었다. 그는 투숙키로 돼있던 외무성 단골 호텔을 떠나 갑자기 그의 친구 별장으로 숙소를 옮겼다. 이유는 '호텔에서 대책회의를 할 때는 반드시 계속해서 테이블을 두드려 가면서 말하라'는 전임자의 충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호텔에 도청녹음기가 설치돼 있으니 충격음을 많이 넣어 영국의 정책이 도청당하지 않게 하라는 조언이었다. 이든경은 회의 도중 테이블을 쉼없이 두드린다는 것이 어려워 아예 숙소를 바꾼 것이다. 그의 회고록에 나오는 에피소드중 하나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도청은 비일비재하다. 미국의 전 대통령 닉슨은 야당 선거사무소의 전화에 도청녹음기를 설치한 소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74년 임기도중 대통령직을 사임하는 불운을 겪었다. 1977년 박동선 사건때는 미 정보기관의 청와대 도청사건으로 한미간 갈등이 증폭됐고 1995년 미일 자동차 협상시에는 미 CIA가 일본측의 기밀회의를 도청해서 물의를 일으킨 적도 있다. 지금은 국제간에 전파에 의한 도청이 많지만 아직도 몰래 녹음은 도청의 중요한 수단중 하나다.
언젠가부터 이러한 몰래 녹음이 우리 사회에도 일반화돼 씁쓰레한 뒷맛을 주고 있다. 어떤 중요한 사건의 해결과 비리의혹 규명에 관련 녹음 테이프가 있다면 이만큼 정확한 증거능력을 갖춘 증거물은 없을 것이다. 국내에서는 일부 법조인들이 부당한 목적과 방법에 의한 비밀녹음은 인격적 침해라 해서 관련 테이프에 대해 민·형사상 증거채택을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비밀 녹음테이프는 증거능력을 부정할 정도의 위법이 아니라는 점에서 대법이 증거능력을 인정한 후 확실한 증거로 채택되고 있다.
최근 최규선 게이트를 수사중인 검찰이 최씨가 주요인사들을 만날 때 녹취한 몰래 녹음테이프 수백점을 압수, 수사가 활기를 띠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래서 수사결과가 기대된다. 그러나 우리는 혹시 누구와 대화할 때 테이블을 계속 두드려야 하는 인간성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성정홍 (논설위원)>성정홍>
몰래 녹음
입력 2002-04-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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