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조선조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피란했던 왕이 이듬 해 10월 한성으로 돌아왔지만, 궁이란 궁은 모두 황폐돼 거처할 만한 곳이 없었다. 낙담한 선조는 100여년 전 세조의 큰 손자 월산대군의 저택이었던 지금의 덕수궁(德壽宮)에 행궁을 정해 정릉동행군(貞陵洞行宮)이라 하고 경내 확장공사를 펼쳤다. 그리고 1608년 승하할 때까지 이곳에서 내외정무(內外政務)를 보았으며 뒤를 이은 광해군 역시 여기서 즉위했다.

광해군은 1611년 창덕궁(昌德宮)으로 이거(移居)하면서 이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이라 이름하였고, 1618년엔 그의 계모 인목대비를 이곳에 유폐시켰다. 그로부터 150여년이 지난 1773년엔 당시 왕 영조가 선조의 환도어거(還都御居) 3주갑(三週甲:60년이 3번 지남)을 맞는 해의 2월 1일 세손(훗날 정조)과 함께 이곳 즉조당에서 선조의 고생을 회상하며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1876년엔 고종황제도 즉조당에서 전배(展拜)하였다. 또 1896년부터 한동안 고종이 러시아 공관에 머물 때는 태후 태자비가 경운궁에 이어(移御)하였으며, 열성어진(列聖御眞)과 명성황후의 빈전(嬪殿)도 경복궁에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고종 또한 1897년 러시아 공관에서 나와 이곳에 머물렀었다.

우리의 옛 왕궁 덕수궁의 역사를 대략 살펴보았다. 처음 왕궁이 될 때부터 구차스럽게 시작되어서일까, 몇세기의 세월이 흘렀어도 좀처럼 한스러운 처지를 벗지 못하는 것 같다. 일제(日帝) 침략 이후 이리 저리 잘려나가더니, 이제는 아예 궁 바로 옆에 미국대사관 직원용 고층 아파트까지 들어서 한층 초라한 모습으로 남을 위기에 놓였다. 더구나 아파트 부지마저 원래는 덕수궁 터로서 왕들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선원전(璿源殿)이 있던 곳이라 한다.

남의 나라 옛 왕궁 바로 옆, 아니 왕궁터에 굳이 8층짜리 아파트를 짓겠다는 미대사관측도 그렇지만, 이를 허용하기 위해 관련법 개정까지 추진한다는 우리 정부당국도 어처구니 없기는 매한가지다. 어차피 비운의 왕궁인 만큼 아무런들 어떠랴 싶은 것일까. <박건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