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의 세계에 '졌지만 잘했다'는 반어(反語)는 없다. '이겼다〓잘했다' '졌다〓못했다'가 어순(語順)이다. 하지만 망친 꼴을 보고도 '그 꼴 참 좋다'고 말하는 등 반어의 월드컵 적용은 다르다. 당초 우승이 목표였던 나라의 패퇴라면 '괜찮아 괜찮아' '그래도 잘했다'는 말은 가당치 않지만 16강이 고소원(固所願)이었던 우리의 4강전 패배에 '졌지만 잘했다'는 칭찬은 썩 제격이기 때문이다.

한국식 '파워 축구'의 축구 강국 부상도 부상이지만 우리는 '축구 내셔널리즘(국가주의)'이라는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했다. 2차대전 때 나치 독일과 파시즘의 이탈리아가 축구 내셔널리즘을 이용했다든지 미국 영화 '어느 멋진 날', 영국 영화 '케미컬 제너레이션' 등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축구만큼 내셔널리즘에 강한 경기도 없다. 69년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는 전쟁까지 벌였고 감정이 안좋은 나라끼리의 경기는 더욱 무서운 내셔널리즘의 독을 품는다.

우리도 이번 월드컵을 계기로 전국민 100%가 신도로 가입한 '대∼한민국' '코리아교(敎)'라는 지순(至純), 지성(至誠)의 종교를 만들었다. 태극기 문양 또한 얼마나 뜨거운 '코리아교' 심벌인가. '대∼한민국'의 '大'자도 광개토대왕의 고구려에나 어울리는 글자였다. '대백제' '대신라'도 과대였고 한말의 '대한제국'도 어울리지 않았다. '작은 대국(大國)' 따위 이른바 형용모순(形容矛盾)의 대표적인 예 같기 때문이었다. 한데 이번만은 '대∼한민국'의 '大'자가 눈에도 귀에도 거북하지 않았다.

무섭다, 경이롭다, 유럽 국가들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등 우리는 세계 언론의 과분한 찬사를 받았다. 22일 오후 덴마크 코펜하겐 공항에 도착한 우리 항공기가 'Red devil(붉은 악마)'이라는 착륙 호출부호까지 받았다고 하지 않던가. 붉은 악마와 길거리 응원을 우리 스포츠 문화코드로 정립, 수출길까지 열어놓은 것이다.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의 응원 또한 가슴 찡한 울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3, 4위전을 넘어 2006년 독일 대회에 대비할 차례다. <吳東煥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