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 선량한 사람들은 빚을 두려워 한다. 당장 급할 때는 단감같겠지만, 그건 결국 두고 두고 갚아 나가야할 무거운 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꼭 그런 사람들만 사는 게 세상은 아니다. 더러는 남의 돈 빌려쓰는 일을 되레 즐기는 이들도 없지 않다. 빌린 돈으로 치부하고 흥청망청 잔치도 벌인다. 그러다가도 정작 갚을 때가 되면 ‘배 째라’는 식으로 뱃심을 내민다. 그리고 그럴 때 피해는 으레 정직하고 선량한 사람들에게 돌아가게 마련이다.

97년 말 외환위기 이후 정부는 서둘러 은행과 기업의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엄청난 돈이 공적자금이라는 이름으로 투입됐고,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어야 했다. 하지만 금융부문 부실을 털어내기 위해 처음 공적자금을 사용할 때만 해도 국민들은 그다지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어느만큼 자금이 투입되면 금세 금융이 살아나고 기업들도 회생할 것으로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가 틈만나면 ‘더 이상 공적자금의 추가 조성은 없다’고 공언하면서도 찔끔찔끔 쏟아부은 금액이 5년새 자그마치 156조원에 이르도록 표나게 불만을 나타내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세계적 신용평가회사인 미국의 무디스사가 실로 놀라운 평가를 내렸다. 우리나라 은행들의 재무건전성이 79개 주요 금융거래국가 가운데 최하위 수준인 70위에 그친다는 것이다. 이는 구조조정을 제대로 못했다는 일본의 66위 보다도 훨씬 처지는 수준이다. 놀라운 건 그 뿐이 아니다. 얼마 전 정부는 그동안 투입된 공적자금 중 무려 69조원이나 회수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여기에 공적자금 채권의 이자 지급을 위해 재정융자 특별회계에서 빌려준 18조원까지 합치면 손실 금액이 87조원으로 는다고도 한다.

애초부터 구조조정 방법이 잘못 선택된 것일까, 아니면 그동안 쏟아부은 156조원으로도 자금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일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그야말로 누군가 몇몇이 ‘빚낸 돈으로 잔치하고 치부했다’는 얘기가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기껏 ‘죽 쑤어서 누구 좋은 일’만 시킨 건 아닌지 모르겠다. <박건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