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월, 일본의 총리 자문기구인 ‘21세기 일본의 구상’이 자못 야심찬 국가전략 기획서를 내놓았다. 이 보고서는 ‘새로운 세기엔 변혁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아래 국가와 개인의 관계를 비롯한 사회시스템 의식 전반의 철저한 개혁을 촉구하고 나섰다. 그리고 그 열쇠로 과감한 세계화와 개인의 창의력 북돋우기를 제시했다. 또한 이를 위한 최우선의 핵심과제로 영어의 제2공용어화를 내세웠다. 인터넷 등을 통한 국제화 정보화로 영어가 이미 국제통용어로 된 이상 이를 국민의 실용어로 삼아야만 21세기 정보문화시대에 적응할 수 있다는 논리에서였다.

마치 제2의 메이지유신이라도 다짐하듯 사뭇 비장한 각오가 엿보이기도 했다. 그후 그같은 구상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추진해 왔는지 세세한 부분까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영어교육에 대해서 무척이나 심혈을 기울여온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성과도 거두어 이제 많은 일본인들의 영어실력이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상당 수준 향상되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그런데 지나치게 외국어 교육을 강화한 탓일까. 최근들어 부쩍 늘어난 외국어 외래어 범람에 정작 자신들의 언어인 일본어가 무척 혼란스러워졌다고 법석들이다. 문부성에선 외국어 외래어 남용에 제동을 걸 위원회를 설치하겠다고까지 한다. 이달 중 설치될 그 위원회에서는 외국어 및 외래어를 일본어로 갈아치운 사례집을 작성, 배포할 임무를 맡게 된다는 소식이다. 그런가 하면 최근 서점가에는 ‘소리내어 읽어보는 아름다운 일본어’ 등 전통적인 일본어의 감각을 되살리려는 갖가지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고도 한다. 모국어를 지키기 위해 꽤나 분주한 모습들이다.

외국어 및 외래어 범람이라면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심각하게 겪어오는 현상이다. 진작에 일본보다 훨씬 더하면 더했지 결코 떨어지지 않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하지만 일본처럼 뒤늦게나마 모국어를 지켜내자며 법석을 떠는 모습들은 그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역시 우리는 남다르게 포용력과 이해심이 넓고 깊을 뿐 아니라 점잖고도 침착한 국민인 모양이다. <박건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