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가 모함에 걸려 사형선고를 받자 측근들은 법망 탈출을 간곡히 권했다. 그러나 그는 '모함에 의한 악법'까지도 존중, 단호히 거절했다. “내가 이 땅에서 태어나 자라고 교육받고 이제까지 살아온 것은 시종 법 테두리 안에서 법의 혜택을 받은 덕분인데 이제 와서 법이 내게 좀 불리하다고 해서 어길 수는 없는 것이네.”

더욱 추상같은 법론을 펼친 사람은 법가(法家)도 법학자도 아닌 물리학자, 이스라엘 건국 초대 대통령에 추대받고도 사양한 아인슈타인이었다. 그는 1946년 6월12일 뉴욕타임스 기고에 이렇게 썼다. “우리의 국가 방위력은 무장에 있지도 않고, 과학에 있지도 않고, 지하 방공호에 있지도 않다. 바로 법질서 속에 있는 것이다.” 법질서가 곧 나라를 지키는 무형(無形)의 군대, 방위력이라는 뜻이다. '물고기는 물 밖으로 나오면 죽고 사람은 법질서 밖으로 나오면 죽는다'는 '탈무드'의 말씀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그 무형의 국가 방위력인 법질서를 무시하는 듯한 사면(赦免)이 너무나 잦다. 형벌이라는 것이 마치 '용서할 사(赦)'자의 은사(恩赦), 특사(特赦), 대사(大赦) 등 선심 쓰기 사면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죄란 용서도 사면도 받을 수 있다. 영어의 사면(pardon)도 관용을 베푼다는 어원에서 왔다. 어원은 다르지만 'amnesty'도 'remission'도 용서해 풀어준다는 사면을 뜻한다. 그러나 이런 법적 용어가 보도되는 선진국의 예는 아주 드물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범법자를 함부로 사면하지 않기 때문이고 수사와 체포, 3심 재판, 복역까지의 오랜 시간 심각하고도 신중한 결정의 법적 과정을 '사면'이라는 일개 축제성(祝祭性) 단어로 어이없는 도로(徒勞)가 되도록 묵살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려 481만명이 받은 교통벌점이 월드컵 성공 국민화합 차원에서 말소된다고 해서 논란이 분분하다. 말소받는 쪽이야 좋겠지만 가뜩이나 엉망인 교통질서를 부채질하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단속경찰의 허탈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무엇보다도 명심할 일은 섣부른 사면은 범법(犯法)을 부추기는 결과가 된다는 것이다. <吳東煥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