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간접선거로는 재선될 수 없다고 판단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군과 경찰 등을 동원, 갖가지 폭력과 위협 속에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 양원제를 골자로 한 발췌개헌안을 국회에서 강제로 통과시킨다. 1952년 5~7월의 이른바 부산 정치파동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평생 대통령을 꿈꾸었던 그는 1954년 9월 눈엣가시인 ‘대통령 중임제한’ 철폐를 골자로 한 개헌안을 또 다시 국회에 제출케 한다. 그러나 그해 11월 국회 표결 결과는 찬성이 135표밖에 안나와 개헌 정족수에서 한표가 모자랐다. 그러자 당시 여당인 자유당은 “재적의원 203명의 3분의 2는 정확하게 135.333…명인데, 자연인을 소수점 이하까지 나눌 수 없기 때문에 4사5입에 의해 가장 근사치 정수인 135명이 맞으므로 개헌안은 가결된 것”이라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그대로 선언됐다.

1967년 재선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 역시 대통령을 두번밖에 할 수 없는 게 불만이었다. 그래서 물의를 무릅쓰고 ‘3선 개헌안’을 국회 제3별관에서 야당 국회의원들 몰래 날치기로 통과시킨다. 1969년 9월 14일 새벽의 일이다. 그렇게 해서 1971년 세번째로 대통령에 선출되긴 했지만, 그의 장기집권욕은 끝이 없었다. 1972년 10월 17일 느닷없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한 뒤, 공포분위기 속에서 마침내 자신의 ‘종신대통령’ 길을 여는 유신헌법을 공포한다.

우리나라 헌정사의 4대 비극이라 할 발췌개헌, 4사5입 개헌, 3선 개헌, 10월 유신의 역사를 대략 더듬어 보았다. 이외에도 우리의 헌법은 몇차례 더 고쳐졌지만, 개헌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게 이 4대 비극이다. 그만큼 잊을 수 없는 충격과 상처로 남겨졌기 때문이리라.

차기 대통령 선거가 불과 5개월 앞으로 다가온 요즘 정치권 일각에서 또 개헌론이 불거지고 있다. 지금이야 누군들 감히 평생 대통령을 꿈꿀 수 있으랴만, 개헌이라니까 또 무슨 정략적 저의라도 숨겨진듯 싶어 괜히 긴장된다. 4대 비극의 충격이 채 다 가시지 않은 탓일까. 그렇다면 그것도 큰 병인데…. <박건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