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3월 29일, 중국 섬서성 임동현 서양촌(西陽村)의 안채공사(晏寀公社) 소속 생산대원들은 서안의 한 평지에서 가뭄극복을 위해 우물공사를 하고 있었다. 며칠간 계속된 작업중 양지발(楊志發)이란 청년의 곡괭이에 둔탁한 소리가 나면서 이상한 형체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2천200여년의 긴 세월동안 땅속에서 죽은 진시황제를 지키던 8천여명의 군사가 철갑옷을 입고 말을 탄 병마용(兵馬俑)의 모습으로 관중평야에 나타난 것이다. 중국은 물론 세계가 놀랐다. 문화유적은 이처럼 우연한 기회에 빛을 보기도 한다.
진시황제 사후 1416년의 시간이 흐른 서기 1206년경 중국의 북쪽 몽골지역에는 새로운 영웅 칭기즈칸이 사상 최대의 몽골제국을 건설, 그 위용을 떨친다. 몽골 씨족연합의 맹주 칭기즈칸은 중국 북쪽 6개 부족을 섬멸한 다음 남 러시아, 크림과 이란 아프가니스탄 등 이슬람교도 지역까지 세력권에 넣는 대 제국을 건설했다. 최근 외신들은 이러한 칭기즈칸의 묘로 보이는 유적이 중국 서남부 오토쿠 초원에서 발견됐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번에는 공사중 우연히 발견된 것이 아니라 유적탐사에 나선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돼 그 진위여부에 세계 학계가 관심을 쏟고 있다.
이란이나 아프가니스탄 등 중앙아시아지역 국가 사람들은 지금도 칭기즈칸을 세계 역사상 가장 악독한 인물로 기억한다. 칭기즈칸이 이 지역을 공격했을 때 날아온 화살에 의해 그의 손자가 죽자 슬픔과 증오가 폭발, 살아 있는 생명체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도륙하고 건물도 철저히 파괴하는 등 폐허화 시켰기 때문으로 전해진다.
1227년 칭기즈칸은 서정(西征)도중 황하상류의 육반산 기슭에서 낙마, 큰 부상을 입고 이것이 원인이 돼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고향인 불칸산에 매장됐으며 유목민족의 풍습대로 기병대가 흙을 밟아 다지고 묘석 등 일체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이 때문에 칭기즈칸의 묘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었다. 진시황제의 중국 통일에 못지 않은 동서양을 넘나든 대 제국을 건설한 칭기즈칸과 몽골국의 옛 영광이 진시황제의 병마용처럼 되살아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성정홍 (논설위원)>성정홍>
칭기스칸의 묘
입력 2002-07-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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