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대처, 스리랑카의 반다라 나이케, 파키스탄의 베나지르 부토, 인도의 인디라 간디, 인도네시아의 메가와티, 필리핀의 아로요와 아키노, 뉴질랜드의 클라크, 방글라데시의 베굼지아, 핀란드의 할로넨…. 전 세계의 전·현직 여성 총리 및 대통령 이름들을 생각나는대로 열거해 보았다. 이중 총리는 지난 1960년 세계 최초로 여성 총리가 된 스리랑카의 반다라 나이케 이후 총 24명을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여기엔 며칠 전 내정된 한국의 장상(張裳) 총리서리도 포함된다.
세계는 이처럼 여러 여성 총리들을 배출해 냈지만, 그 어디서도 여성이기 때문에 나약하다든지 직무수행에 문제가 있다는 등의 얘기는 여태껏 들어본 기억이 없다. 오히려 영국의 대처와 같은 경우는 ‘뿌리깊은 노조파업 문제를 힘으로 밀어붙여서 경제회생을 이뤄냈다’ 하여 ‘철의 여인’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그런데 문화와 전통이 자못 유별나서일까, 유독 한국에서만은 다른 나라들처럼 여성 총리를 예사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있는 것 같다. “대통령 유고(有故) 때 총리가 대통령직을 승계한다면 어떻게 장관들을 휘어잡고 국방 등 국정을 이끌어갈 수 있겠느냐.” 어느 국회의원이 했다는 말이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여성은 국방을 모른다’는 게 된다. 프랑스 국방장관 미셸 알리오 마리, 러시아 국방차관 류보비 쿠텔리나, 이스라엘 국방차관이던 달리아 라빈 펠로소프 등이 모두 여성이라던데. 아마도 그는 그같은 사실을 미처 생각 못했던 모양이다.
즉각 ‘시대에 뒤떨어진 여성 비하’발언이란 여론의 몰매를 맞고, 우물쭈물 사과를 했다지만 파문은 좀처럼 쉽게 가실 것 같지 않다. 다른 사람도 아닌 소위 지도층이라는 국회의원이 그런 말을 서슴없이 했으니 그 파장이 오죽하랴. 그래서 슬그머니 걱정이 앞선다. 이러다 정작 중요한 장 총리서리 장남의 병역 및 국적문제, 주민등록 문제, 학력 허위기재 논란, 재산 등에 대한 검증은 되레 뒷전으로 밀리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다. 하기야 총리 인준에 그런 문제들이 불거져야 하는 현실부터가 씁쓸하긴 하지만. <박건영 (논설위원)>박건영>
씁쓸한 현실
입력 2002-07-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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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7-16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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