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적이지만 ‘베니스의 상인’(셰익스피어의 희극)에 나오는 유태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은 분명 운 나쁜 인물이었다. 하필이면 원수처럼 여기던 안토니오에게 빚을 준 것부터가 화근일 수밖에 없었다. 안토니오를 미워하지 않았다면 굳이 빚돈 대신 살 한 파운드를 요구하는 억지는 부리지 않았을 것이고, 또 그랬다면 소송에 져서 재산을 몰수당하는 비극도 없었겠기에 하는 말이다. 그는 모든 재산을 빼앗겼을 뿐 아니라 당시 유태인으로선 가장 수치스럽게도 그리스도교로 개종당하는 곤욕까지 치러야 했다.
“크리토, 내가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는데 자네가 대신 갚아주게.” 고대 그리스의 철인 소크라테스가 숨을 거두기 직전 했다는 이 말은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교과서적 교훈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뒤집어 생각해보면 아스클레피오스(의술의 신) 신전측의 행운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처럼 양심적이고 고결한 인물에게 빚을 주었기에 망정이지, 행여라도 비양심적 인물에게 주었다면 닭 한 마리인들 건질 수 있었을까 싶어서다.
지난 91년 북방정책을 추진한다며 구(舊)소련(현 러시아)에 엄청난 금액의 차관을 제공한 일은 아무래도 우리 정부의 불운이 아니었나 싶다. 하필이면 차관을 제공하자마자 곧이어 공산정권이 해체되는 등 러시아의 정정불안이 몰려왔다. 덕분에 10년이 넘어 만기가 지나도록 이자는커녕 원금조차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 당시 정부의 지급보증으로 국내 시중은행들이 제공한 차관 원금은 총 14억7천만달러였다. 그것이 지금은 이자를 포함해 무려 19억5천만달러로 늘어났다. 그런데도 러시아 정부는 뒤늦게 이자율 인하, 상환기간 연기 등 억지 요구만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정부도 꽤 지친 모양이다. 돌연 차관을 제공했던 시중은행들에게 정부예산으로 대신 갚아주겠다고 나섰다. 은행도 은행이지만 누구보다 러시아가 무척 반길 듯싶다. 어쩌면 빚을 완전히 털어버리는 걸로 알지도 모르니까. 국민 혈세로 대신 빚 갚아주는 관대한 한국정부, 러시아로선 이런 ‘산타클로스’가 또 없겠다. <박건영 (논설위원)>박건영>
산타클로스?
입력 2002-07-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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