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부터 1973년까지 전쟁터 베트남에 우리의 군인과 근로자들이 파견되면서, 그들이 벌어들인 외화는 어려웠던 우리나라에 단비 노릇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그 대가는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했고, 아직도 많은 이들이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여기에 한국과 베트남 양국이 두고 두고 치유해나가야 할 ‘라이 따이한(한-베 혼혈아)’문제까지 안겨줬다.

전쟁중 한국인 남성과 베트남 여인들 사이에 많은 한국인 2세들(1만여명 추정)이 태어났다. 그리고 그 2세들은 수십년 아버지 없는 자식으로 갖은 어려움과 핍박 속에 서럽게 살아가야 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정확한 숫자조차 파악 못한 채 30년 가까운 세월 무관심 속에 버려두었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이 아버지를 찾아나섰다. 얼마 전부터 한국인 아버지를 상대로 친생자 인지 청구소송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 둘 승소하고 있다.

그들의 승소는 단순히 부자관계가 법적으로 인정됐다는 의미만 갖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 아버지 호적에 이름이 올려지게 될 뿐 아니라, 한국국적을 취득하고 한국인 형제들과 함께 동등한 상속권도 갖게된다. 소송비용이 만만찮겠지만 승소 확률은 상당히 높은 편이라고 한다. 부모들의 결혼증명서나 가족사진 등 자료가 없어도 유전자 분석을 통해 친생자임을 입증하면 되기 때문이다. 또 국내에 체류할 수 없다 해도 유전자 감식이 필요할 때, 법정에 출석해야할 때만 한차례씩 한국을 방문하면 된다. 당연히 시간이 갈수록 소송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수십년 ‘나 몰라라’ 했던 한국인 아버지들, 심기 불편해할 이들이 꽤 많을 듯싶다. 뒤늦게 당혹스럽기도 하려니와 갑자기 나타난 자식으로 자칫 가정불화를 몰고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산 상속을 둘러싼 한국과 베트남 형제들간 다툼도 다분히 생길 수 있다. 이쯤되고 보면 한·베트남 수교를 차라리 원망스러워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랴, 어차피 자신이 뿌리고 키운 업인 것을. 수십년 부양 책임 안졌던 것만도 고맙게 여길밖에…. <박건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