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정국가였던 조선의 왕들은 흔히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던 것으로 보기 쉽다. 하지만 연산 광해군 등 일부를 제외하곤 전제적 왕권을 행사한 예가 극히 드물었다고 전해진다. 국왕의 독재를 견제하고 정치의 투명성을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가 거미줄처럼 짜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국정 총괄기구인 의정부와 그 휘하 행정집행기구인 6조가 있어 이들의 합의가 없으면 왕이라도 마음대로 국가정책을 결정하지 못했다. 여기에 왕에 대한 비판을 맡았던 사간원과 관리들의 비행을 규찰하는 사헌부가 통합적으로 운영되어 왕권을 견제했다.

특히 실록이 편찬돼 후세의 평가를 받기에 왕권은 더 더욱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엔 왕이 죽으면 일정기간의 토론을 거친 뒤 그 왕의 실록을 편찬했다. 그리고 실록에 이용된 자료는 정부 각 기관에서 보고한 문서를 비롯, 승정원 일기와 사관(史官)들이 왕의 일거수 일투족을 쫓아다니며 기록한 사초(史草) 등 실로 다양했다.

실록 편찬은 사실의 신빙성을 최대한 보호하는 역사기록 과정이었다. 그래서 설사 왕이라 해도 전왕의 실록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하지 말라면 더욱 하고 싶은 법, 성군 중 성군이라던 세종도 선왕의 기록인 ‘태종실록’을 무척 보고싶어 했던 모양이다. 그때 한 신하가 나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실록에 기재된 것은 당대의 사실이며, 당대에 실록을 쓰지 않는 이유도 왜곡시킬 수 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물며 전하께서 이를 보고 고치시기라도 한다면 후세의 임금이 또 본받아 행할 것입니다. 그러면 사관들이 두려워서 제대로 기록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쯤되니 세종도 머쓱해져 더는 조르지 못했다고 한다.

내년부터 고교생들이 배울 ‘한국 근현대사’ 일부 교과서의 편파기술 시비가 좀처럼 그치질 않고 있다. 전 정부엔 비판적 서술이 많은 반면, 현 정부에 대해선 치적(治績) 일변도로 편향적 기술을 했는데도 교육부 검정을 통과했다는 것이다. 경위야 어찌됐든 결코 유쾌한 상황이 아니다. 당대의 실록 쓰기를 굳이 피했던 선조들의 깊은 뜻을 조금은 헤아릴 수 있을 것도 같다. <박건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