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보트 피플 3가족 21명이 해경에 의해 발견돼 귀순했다. 어선을 타고 선천을 출발해서 북한을 탈출, 하루 이상 바다를 떠돌다 다행히 구조된 것이다. 북한땅을 출발한 보트 피플은 지난 1987년 청진병원 의사 김만철씨 일가족이 처음. 이들은 일본에 도착한 뒤 한국에 망명을 했고 1997년에는 북한 어민인 안선국 김원형씨 가족 14명이 보트 피플이 돼 탈북했었다.

보트 피플은 70년대 베트남 패망과 공산화의 상징이다. 1975년 4월30일 사이공이 함락하면서 베트남이 완전 공산화되자 공산치하에서 살기를 거부하고 배를 타고 국가를 탈출, 망망대해를 떠돌았던 난민들이 소위 보트 피플이었다. 그래서 보트 피플은 나라잃은 설움의 대명사가 됐다. 1979년까지 발생한 이들 베트남의 보트 피플은 약 20여만명이나 됐다.

공산 베트남 체제가 확립된 80년 이후에도 보트 피플은 계속 발생했다. 전쟁과 정치적 이유가 아닌 경제적 가난이 주된 원인이었다. 이러한 베트남의 보트 피플 행렬은 1992년까지 계속됐다. 유엔 난민 고등판무관(UNHCR)의 통계에 의하면 1976년부터 1992년까지 16년동안 베트남을 탈출한 베트남인은 무려 79만3천여명에 달한다. 정치적 이유보다 가난 때문에 탈출한 난민과 보트 피플이 75%에 이르는 셈이다. 지금은 베트남이 자유 시장경제 체제 도입으로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함으로써 해외에 나가있던 보트 피플의 역 이민현상을 보이고 있다니 정말 다행이다.

탈북자 지원활동을 하고 있는 독일인 의사 노에르트 폴러첸씨는 지난 3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979년 독일언론인 루페르트 노이테크가 9천여명의 베트남 보트 피플을 주도했던 것처럼 2002 월드컵 기간중 북한판 대규모 보트 피플을 만들겠다고 장담한 적이 있다. 어쨌거나 지난 6월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베트남 사례에서 보듯이 경제난에 의한 보트 피플의 급증은 북한이라고 해서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 어쩌면 북한의 개방에 따라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해질지도 모른다. 이젠 이에 대한 대비책도 강구해야 할 때인 것 같다. <성정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