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거장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 '길(La strada)'은 지능이 모자라지만 그만큼 순수한 영혼을 지닌 젤소미나와 야수적 본능에 충실한 차력사 잠파노가 걸었던 삶의 여로(旅路)를 단아한 흑백화면에 담아낸 영화사의 고전이다. 이렇듯 '길(路)'이 '인생'이나 '삶'으로 치환되면 철학, 종교, 예술 등 모든 인문분야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된다. 또 인류의 역사가 어차피 인간들이 걸어온 길을 의미한다는데 생각이 미치면 '길'이라는 단어가 빚어내는 사유(思惟)의 광대함에 저절로 초라해질 수밖에 없다.
'실크로드(Silk Road)'를 단순히 '비단길'로 이해하면 곤란한 이유가 이 때문이다. 19세기 말 독일의 지리학자 페르디난트 폰 리히토펜은 중국과 서양을 연결했던 육·해상의 모든 교역로를 통칭해 실크로드로 명명했다. 그러나 실크로드는 통상로보다는 동서양의 문화소통로로서 인류사적 의미가 더욱 크다. 중국보다 비단을 먼저 접한 로마인들은 비단을 '세리카(serica)'로 불렀는데 학계에서는 비단을 지칭하는 중국말 '시(絲)'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중국을 세계의 끝에 있는 신비한 세르(몽골말로 비단)인의 나라로 지칭하며 “세르인은 200~300년까지 산다”고 생각했다. 중국 또한 로마를 대진국(大秦國)이라 칭하며 '후한서'에 “그나라 사람들은 모두 키가 크고 윤곽이 뚜렷한데 중국사람과 비슷하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동서문명의 양축이면서도 서로 신비한 대상이었던 로마와 중국을 연결시킨 최초의 '엔터 키(Enter key)'가 바로 비단이었던 셈이다.
최근 국내에서는 이 실크로드가 '철의 실크로드'로 다시 환생해 한창 각광받고 있다. 시베리아횡단철도(TSR), 중국횡단철도(TCR)와 연결된 한반도종단철도(Trans Korea Railway·약칭 TKR)가 가져올 미래의 경제번영에 대한 희망 때문이다. 최근 남북간에 경의선, 경원선 복원이 구체화된 덕분이다. 그러나 우리가 정작 개통을 서둘러야 할 것은 경제적으로 '한국'을 관통하는 TKR보다는,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한국인'을 관통하는 평화로, 'Trans Korean Peaceway'가 아닐까 싶다. 모든 분야에서 서로 갈등하고 반목하는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이 극에 달했다는 좌절감에 절로 깃든 생각이다. <윤인수 (논설위원)>윤인수>
길 (路)
입력 2002-09-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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