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엔 왕이나 세자가 결혼하려면 전국적으로 그 배우자를 고르는 간택령부터 내렸다. 그리고 금혼령까지 발하여 간택이 끝날 때까지는 9~13세, 또는 13~18세 민간 처자(處子)들의 결혼을 엄격하게 금했다. 왕비나 세자비로 선택되기를 기다리며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한다는 취지에서였다. 간택령은 딸 가진 부모들에게 그다지 달가운 일이 못되었다. 천재일우의 행운을 잡아 왕비나 세자비 물망에라도 오를 수 있는 몇몇 대가집이라면 또 모를까, 대다수 처자들에겐 공연히 혼기만 놓칠 우려가 더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웬만한 부모들은 간택령이 내려지겠다 싶으면 미리 미리 서둘러서 딸들을 결혼시켜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중앙선관위가 16대 대선 선거운동 기간인 오는 11월27일부터 12월19일까지 동창회 향우회 종친회 등 각종 송년모임을 금지한다고 밝히자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선관위로서야 이를 원천적으로 금지한 선거법 규정(2000년 2월 개정)에 따른 것일테니 어쩌면 억울한 비난을 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또 그동안 동창회 향우회 등이 불·탈법 선거운동에 악용된 사례도 적지않은 만큼 선거의 공정성 확보를 위한 고육책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규제를 받아야 하는 국민 입장에선 사뭇 어처구니가 없을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만남을 법으로 제약한다는 것부터가 어불성설로 비친다. 모임에 정치인이 개입하는 등 불·탈법 행위가 있는지 감시 감독하면 되는 것이지 모임 자체를 아예 못하게 막아버리는 것은 ‘구더기 무서워 장(醬) 못담그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비난이 높다. 일각에선 헌법에 보장된 행복추구권을 침해할 뿐 아니라 집회·결사의 자유에도 위배된다며 격분한다.
심지어 선관위 인터넷 홈페이지엔 다음과 같은 글도 올랐다고 한다. “높은 분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맞춰 만백성의 활동을 조절해야 하니, 이게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나라인지 의문이 든다.” 마치 왕비나 세자비 한 사람을 고르기 위해 전국에 금혼령을 내렸던 조선시대 간택령에 대한 원성을 다시 듣는 느낌이다. 엉뚱한 비약일까. <박건영 (논설위원)>박건영>
간택령
입력 2002-09-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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