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격 개각'이니 '전격 회동'이라고 할 때의 '전격(電擊)'이란 말은 글자 그대로 '번개 번쩍'이고 '벼락치기'다. 1945년 2월 루스벨트와 처칠, 스탈린이 크림(크림스키)반도의 흑해 휴양지 얄타에서 가진 미·영·소 얄타 정상회담부터가 '전격적'이었다고 당시 영어권 신문들은 블리츠(blitz)라는 단어를 썼고 그 두 달 뒤 트루먼, 처칠, 스탈린의 포츠담 회담 역시 '전격적'이었다고 썼다. 한데 그 유명한 정상회담은 이미 결정되고 준비된 절차와 수순(手順)에 의한 것이었지 '전격적'은 아니었다. 미·중 관계 정상화의 닉슨·마오쩌둥(毛澤東)의 72년 2월 베이징 회담도 키신저의 밀사외교에 의한 이른바 '닉신저' 작품이었고 그 해 9월 다나카(田中)·마오쩌둥 회담도 물밑 접촉 결과였다. 61년의 박정희·이케다(池田) 회담 또한 그랬다.
하긴 '준(準) 전격 회담'도 있긴 있다. 조문(弔問)과 축하사절 자격의 만남이다. 74년 4월 집무 중 갑자기 숨진 퐁피두 프랑스 대통령의 추도 미사(노트르담 사원)에 나란히 앉아 '마태 수난곡'에 눈을 감던 닉슨과 다나카가 “도쿄에 오시오” “좋수다” 해가며 정상회담을 한 것 등이다. 그런데 그 회담은 가장 불행한 정상회담으로 기록된다. 바로 그 해 8월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물러났고 다나카는 금맥(金脈) 게이트로 낙마(11월)했기 때문이다.
또 한 번 전격적이었다는 이번 고이즈미(小泉)·김정일 회담 역시 즉시 거둘 결실이냐, 약속 따로 성과 따로냐 등 차후 문제에 대한 관심보다는 세계 정상회담 사상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진기한 기록을 남길 듯싶다. 지난 번 김·푸틴, 김·장쩌민(江澤民) 만남처럼 악수→양뺨 비비기→격렬한 포옹도 아니고 하다못해 어색한 웃음, 씁쓰레한 미소도 아닌 심각하다 못해 성난 두 얼굴이 마치 결투장에 나선 투사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 하루 일정에다 오찬마저 별도였다지 않은가. 같은 나이(60), 같은 혈액형(A형), 같은 영문 이니셜(KJ), 같은 부친 후광 등 친밀감에 얼싸안고 빙글빙글 돌기라도 할 것 같았는데…. <吳東煥 (논설위원)>吳東煥>
성난 정상회담
입력 2002-09-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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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9-18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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