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박자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다. 관객들도 박수를 치며 흥겨워했다. 그러나 한쪽 구석에 있는 4명만이 슬프고 멍한 표정으로 사람들에게 무슨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알고 보니 생사조차 알 수 없는 개구리 소년을 찾는 부모들이었다'. 전국을 떠돌며 소위 뽕짝 유행가 테이프 장사를 하며 실종 어린이 찾기 운동을 펴고 있던 나주봉씨는 실종된 개구리 소년들의 부모들을 이렇게 인천 월미도에서 처음 만났다고 했다.
 
지난 1991년 3월26일 개구리를 잡으러 간다며 나간 후 실종된 대구시 달서구 성서초등학교생 김종식군등 어린이 5명의 부모들은 이처럼 전국 방방곡곡을 찾지 않은 곳이 없었다. '유괴돼 살해됐다' '어딘가 살아 있다' '북에 납치됐다'는 뜬소문까지 무성했다. 이들 개구리 소년들은 전국초등교생들의 글짓기 소재도 됐다. '개구리 잡으러 갔지 너희들은/ 목놓아 불러봐도 대답없는 친구들아/ 개구리 따라 개구리처럼 깊은 산 속에서 겨울잠을 자다가/ 새봄이 오면 다시 엄마 품으로 오려나…후략'(당시 초등교 4년 김종렬군 시)

이 시를 지은 김군의 예언(?)처럼 이들 개구리 소년들은 집 근처 와룡산 깊은 골짜기에서 정확히 11년 6개월 동안 어처구니없는 슬픈 겨울잠을 자다가 부모의 품으로 돌아왔다. 경찰은 실종직후 지금까지 연인원 32만1천여명을 동원, 추측 가능한 모든 방향에서 이들 소년들의 행적과 자취를 조사해왔다. 525차례나 와룡산과 주변산을 뒤졌다고도 한다. 그런데도 허사였다. 그런데 이들 소년들의 유골은 마을이 개발돼 아파트가 들어서자 주민들의 와룡산 산책과 등산이 잦아지면서 한 주민에 의해 발견됐다. 소년들의 유품도 실종당시 그대로 발견됐다고 한다.

산골짜기에서 어둠과 추위, 배고픔에 시달린 듯 서로 엉켜있었던 듯하다는 경찰의 추정이다. 몇 가지 의문이 남는다. 경찰의 말대로 그렇게 이 잡듯이 샅샅이 산을 뒤졌는 데도 그 동안 왜 발견하지 못했을까. 마을에서 불과 3.5㎞밖에 안 떨어져 있는데 왜 하산하지 못했을까. 한 명이라도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었을까. 모든게 아쉬움만 남을 뿐이다. <成定洪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