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은 주지도 말고 지지도 말라. 빚을 주면 돈과 사람을 둘 다 잃고 빚을 지면 절약하는 마음이 무너진다.” 셰익스피어의 ‘햄릿’ 1막3장에 나오는 이런 말쯤은 점잖은 톤이다. 구약성서 ‘잠언’의 경고는 몇 옥타브 드세다.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 빚진 자는 채주(債主)의 종이 되느니라.” ‘빚진 종’이라면 ‘빚준 상전’이다. ‘빚진 죄인’이라는 말도 있고 ‘빚 보인(保人)하는 사람은 낳지도 말라’고 했다. 빚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일깨우는 경종의 말씀이 아닐 수 없다.

‘빚으로 계집 뺏기’만 해도 무서웠다. 아내나 딸을 걸고 빚을 얻었다가 채무 날짜를 어겼을 경우 채주의 첩실 등으로 뺏겨버리는 사례였다. 인신만 뺏기는 게 아니었다. 효녀 심청은 공양미 300석 빚더미에 목숨까지 헌납했다. 오죽하면 빚 귀신, ‘채귀(債鬼)’라는 말까지 국어사전에 올랐을까.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런 채귀에 쫓겨 소설 ‘가난한 사람들’을 서둘러 탈고했고 슈베르트는 그의 옥보(玉譜)를 떨이판매하기 일쑤였다. 그는 모차르트가 채귀에게 쫓겨 철야로 악보를 그리다가 35세에 요절했듯이 31세로 그를 뒤따르고 말았다.

콩팥을 비롯해 장기(臟器)라도 떼어내 빚을 갚으라는 빚쟁이나 100만원 빚에 1억2천만원이나 갈취하는 등 요즘의 ‘빚 귀신’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빚주고 뺨맞는다’는 속담처럼 갚을 수 있는데도 갚지 않는 뻔뻔스런 사람도 적지 않다. 올해 790여건으로 급격히 늘었다는 개인파산 신청자 중에는 그런 배포 두둑한 사람도 끼여 있을지 모른다. 빚 ‘채(債)’자는 ‘사람(人)의 책임(責)’을 뜻한다. 제 때에 꼭 갚아야 하는 게 빚이다.

무엇보다도 오욕(五慾)의 첫 번째인 물욕(物慾)과 우선 갖고 보자, 쓰고 보자는 식의 소비 심리가 문제다. 그러나 현진건의 ‘술 권하는 사회’가 아닌 빚 권하는 사회, 외상이라면 소도 잡는다는 ‘외상 권하는 사회’의 책임 또한 크다. 아니, 파산이면 파산이었지 ‘구제’라는 단어가 따라붙는 ‘파산과(破産課)’라는 희한한 과가 법원에 다 있다는 자체도 괴이한 일 아닌가. <오동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