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작가 펄벅여사 하면 떠오르는 것은 역시 노벨문학상의 3부작 장편소설 '대지'다. 그녀는 이 소설을 통해 1930년대 세계 열강들의 각축 속에 핍박받는 중국 농촌을 무대로 대지(大地)만을 꿋꿋이 믿고 사는 농민들의 모습과 인간답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운명을 묘사해 전 세계 독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또한 휴머니즘과 박애주의의 표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푸른 눈의 동양인'으로 불린 펄벅은 1892년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에서 태어난지 불과 석달만에 선교사인 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소녀시절까지 성장했다. 18세가 되던 해 미국에 돌아가 버지니아주의 랜돌프 메콘여자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 수석으로 대학을 졸업했지만 이내 중국으로 다시 건너와 난징대학에서 영문학을 강의하고 또 오랜 기간 장로교 선교사로서도 활동했다. 때문에 그녀는 중국을 '제2의 조국'으로 생각했으며 평생동안 중국인들과의 간격을 메워보려 애를 썼다. 동서양문명의 갈등을 다룬 ‘동풍서풍’을 처녀작으로 출간한 이래 73년 폐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동서양을 배경으로 한 80여편의 작품을 남겼다.

기근과 홍수에 시달리는 중국난민들을 위해 일했던 부모처럼 사람들의 고통을 덜기 위해서는 자신이 헌신해야 한다는 생각을 늘 가졌던 펄벅은 지난 67년 당시로서는 엄청난 돈인 전 재산 700만달러를 펄벅재단 설립에 희사하고 부천군 소사읍 심곡리에 '소사희망원'을 열어 전쟁고아와 혼혈아들을 보살폈다. 또 혼혈아들을 입양시키는 일에 헌신했고 그녀 자신도 9명의 아이를 양자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가수 윤수일 인순이 박일준 등도 이 곳 출신이거나 펄벅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로 이제 지천명(知天命)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73년 펄벅이 세상을 떠나고 소사희망원이 해체된 이 곳에 펄벅여사의 기념관이 건립된다고 한다. 각박한 세태에 봉사와 희생정신이 강조되는 요즘 자칫 역사 속에 희미하게 사라질지도 모를 펄벅을 기리는 기념관이 청소년들과 사회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연고도 없는 나라에 와서 2천여명의 고아 등 소외된 어린이들을 조건 없는 사랑으로 보살핀 펄벅. 오히려 늦은 감이 있지만 부천시도 역사에 길이 남을 결정을 했다는 생각이다. <李俊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