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간 중세의 기사도에 흠뻑 빠져 그 시절을 그리다 마침내는 정신까지 놓아버린 돈키호테. 그는 스스로 기사가 됐다는 착각 속에 갑옷을 입고 칼을 찬 채 광기와 몽상의 여행길을 떠난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부정과 비리를 도려내고 학대당하는 사람들을 돕는다며, 심지어 풍차와도 겨루는 등 좌충우돌하면서 우스꽝스러운 행적을 기록해나간다. 당연히 그런 그에게 돌아온 건 언제나 비통한 실패와 패배의 연속일 뿐이다’. 세르반테스의 풍자소설 ‘돈키호테’ 줄거리다.

“인종격리 정책을 내걸고 1948년 대통령에 출마했던 스트롬 서몬드 상원의원이 당시 당선됐더라면 미국은 더 나은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다.” 미국 상원의 트렌트 로트 의원(미시시피)이 얼마 전 이같은 발언을 했다가 호된 곤욕을 치렀다. 미국내 인권운동가 등의 항의가 빗발친 건 물론이고, 부시 대통령으로부터도 공개적인 비난을 받았다. 결국 그는 그때까지 차지하고 앉았던 상원 공화당 대표직까지 내놓아야 했다. 내년이면 상원의 공화당 원내총무를 맡을 참이기도 했건만, 그 역시 과거 선조들의 영광(?)만을 그리다 돈키호테 꼴이 되고 만 셈이다. 지난 날 수많은 인디언을 학살하고,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붙잡아다 노예로 부려먹던 선조들의 세계가 그렇게도 그립고 자랑스럽게 여겨졌던 것일까.

돈키호테는 그토록 가혹한 패배를 겪으면서도 자신의 가상한(?) 용기와 고귀한(?) 뜻을 조금도 꺾지 않은 인물로 그려져 있다. 로트 의원 또한 자신의 의지를 굽힐 뜻은 전혀 없는 모양이다. 상원 공화당 대표직 사임 후 첫 공식 발언으로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정적들이 쳐놓은 덫에 걸려든 희생양일 뿐이다”라고.

유난히도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인권존중을 강조해온 나라가 미국이다. 그런 미국에서 로트 의원 같은 인종차별주의자가 상원의 집권당 대표직을 맡았을 뿐 아니라 원내총무까지 예정될 수 있었다는 게 좀처럼 쉽게 이해되질 않는다. 역시 크고 넓은 나라인지라 포용력 또한 한없이 넓어서일까. 그건 그만큼 또 다른 로트 의원이 많이 나올 수 있다는 의미도 될텐데…. <박건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