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신정을 기준으로 간지(干支)를 새기기는 좀 그렇다. 언론에서는 계미년 새해가 밝았다며 12지중 '양(未)'이 의미하는 바를 널리 알리고, 새로 나온 양력달력에는 1월달부터 계미(癸未)의 해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2003년 1월 한달은 꽉차게 모두 임오(壬午)의 날이다. 임오의 말 궁둥이가 눈에 선연한데 양력 달력은 억지로 계미의 양뿔을 들이미는 형국이다. 세시풍속은 음력을 따르면서, 세상의 모든 비즈니스는 양력에 맞추어 살아야 하는 한자문화권 사람들의 시대적 오류인 셈이다.
양(羊)의 이미지가 유순하고 온화해서인지는 몰라도 역사적으로 양의 해에는 큰 탈이 없었다고 한다. 또 양은 인류가 문명을 열기 전인 신석기시대부터 인류에게 헌신해왔다. 고기는 물론이고 그 가죽은 문명 전에는 추위를 막아주었고 이후에는 무지(無知)를 막아주었다. 양피지에 담긴 역사 종교 신화 문학은 오늘날 화려한 인류 문명으로 꽃피어 있는 것이다. 신께 인간을 대신해 바칠 신성한 동물도 양뿐이었다. 하느님 앞에서 인간은 길 잃은 양떼이기도 했으니, 신에게는 인간과 양이 동종(同種)일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양이 아직까지도 낯선 동물이고 한국문화에서 양의 위치는 미미하다. 관련 신화나 전설도 찾아보기 어렵다. 농경민족인 우리가 유목민족의 가축인 양을 접한 시기가 5천년 역사에서 볼 때 극히 최근의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양의 유순한 이미지는 우리를 닮았다. 발정난 숫양의 신기(神氣)도 월드컵 4강신화를 만든 우리의 신바람과 매우 유사하다.
그런데 다가오는 새해의 전망은 모두가 우리를 힘들게 할 것으로 보이니 걱정이다. 북핵문제도 그렇고 불투명한 경제전망도 그렇다. 대선으로 불거진 사람사이의 갈등도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아직은 음력으로 날을 세고 싶어진다. 물러가는 임오가 마지막 힘을 모아 이런저런 액운을 뒷발질로 멀리 멀리 차내주었으면 해서다. 그것도 얼마 남지 않은 한달 동안에…. 계미 새해에는 한민족이 오순도순 살아가는 한해가 됐으면 하는 소망이 간절하다. <윤인수 (논설위원)>윤인수>
'임오'와 '계미' 사이에서
입력 2002-12-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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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31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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