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분명 왕정국가였지만, 왕이라고 해서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둘렀던 건 아니다. 국왕의 독주를 견제하는 제도적 장치가 거미줄처럼 짜여 있었던 것이다. 우선 국정 총괄기구인 의정부와 그 휘하 행정집행기구인 육조가 있어 이들의 합의가 없으면 왕이라도 마음대로 국가정책을 결정하지 못했다. 여기에 국왕에 대한 비판을 맡았던 사간원, 관리들의 비행을 규찰하는 사헌부가 통합적으로 운영되어 왕권을 견제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실록편찬이 있었다. 조선시대엔 왕이 죽으면 곧바로 그의 실록을 편찬했다. 그때 이용된 자료는 정부 각 기관에서 보고한 문서를 비롯, 승정원 일기 등 실로 다양했다. 그러나 특히 핵심적인 자료는 사관(史官)이 기록한 사초(史草)였다. 사관은 왕의 언행을 낱낱이 기록하기 위해 늘상 왕 옆에 붙어다녔고, 각종 회의에 참석하여 왕과 신하들이 논의하고 처리하는 내용을 일일이 기록했다. 최고 권력자의 일거수 일투족을 기록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왕에 대한 큰 제약이었으리라. 실록편찬은 사실의 신빙성을 최대한 보호하는 역사기록 과정이었다.
2년여 전 고 박정희 전대통령의 초기 국정일지가 발견돼 모처럼 역대 대통령들의 통치사료에 대한 관심을 불러모았던 적이 있다. 하지만 그런 관심은 곧 이어 접어야 했다. 안타깝게도 건국 반세기 동안 30년 가까운 기간의 기록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박 전대통령의 사료도 그때 발견된 것 외엔 그 이후 69~79년의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밖에 여러 전대통령들의 사료도 대부분 폐기됐거나 사저로 가져간 것으로 파악됐다. 그나마 남아 있다는 노태우·김영삼 전대통령의 사료도 거의가 공개행사와 연설문 등 언론에 보도된 내용뿐이었다고 했다. 통치자의 실감나고 진솔한 대화기록 등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었다는 것이다. 역사의식이 희박했던 것인지, 아니면 감추고 싶은 게 그렇게도 많았는지 모르지만 그때의 실망은 너무도 컸다.
이제 한달여만 있으면 또 새 대통령이 취임한다. 그래서 자못 궁금해진다. 지난 5년간의 사료는 과연 어찌될까 싶어서. <박건영 (논설위원)>박건영>
역사기록
입력 2003-01-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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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1-14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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