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홈페이지에 오른 '민주당 살생부'가 끊임없이 화제다. 급기야 민주당은 20일 문제의 '인터넷 살생부'를 사직당국에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살생부(殺生簿), 살리고 죽일 사람의 명단을 적어놓은 명부(名簿)라니 듣기에도 끔찍하다. 이와 비슷한 어감으로 쓰이는 영어단어는 블랙리스트이다. 사전적 의미가 '요주의 인물 일람표'다. 이는 살생부보다는 차원이 낮다. 주의하고 관리해야 할 명단이니, 죽이고 살리기 이전의 단계다. 살생부를 굳이 영어로 표현하자면 핏빛이 도는 '레드리스트'가 어울릴 것이다. 수양대군의 심복 한명회가 살생부를 들고 정적들을 불러들일 때 임금의 명패를 이용했는데, 임금이 3품 이상의 벼슬아치를 불러들일 때 그 증거로 삼은 명패는 붉은 칠을 한 나무패였다.

우리처럼 살생부가 흔한 나라도 없지 싶다. 전제군주 시절에는 왕조가 바뀔 때나, 왕을 갈아치울 때마다 등장한 살생부가 지금은 각 분야에서 난무한다. 정치권에서는 정권이 바뀔 때나 정당의 리더가 교체될 때마다 살생부가 어김없이 등장해 실제로 집행된 사례가 적지 않다. 그러던 것이 요즘 들어서는 구조조정을 앞둔 기업에서도 비서실이나 기획조정실에서 작성하는 살생부 명단에 샐러리맨들의 목숨이 왔다갔다 한다. 또 지방선거가 끝나면 각 지방자치단체마다 공무원의 살생부가 난무하고 있으니 세태의 살벌함이 너무 가혹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살생부는 전제적인 권력이 지배하는 세상이면 동서고금 어디서나 횡행했던 정치도구였다. 국가권력이 1인 혹은 1당에 집중되면, 네편 내편이 선명해지고 내편이 아닌 쪽은 살부(殺簿)에 오를 수밖에 없다. 피의 숙청(肅淸)을 통한 통치인 셈이다.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선혈이 흐르는 숙청 속에서 피어난 정치이념이다. 영국과 프랑스가 그랬고 우리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제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세상이 됐다. 그런데 전제·독재 시절의 정치도구인 살생부가 여전히 횡행하고 있다니, 그것도 권력평준화의 신도구인 인터넷에까지 올랐다니 통탄할 일이다. 살생부를 작성하는 어두운 그림자는 발본색원해야 마땅하다. <윤인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