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와 조선조 궁중에서 쓸 기름·꿀·후추 따위의 당시로선 귀한 물품을 보관하던 창고를 의영고(義盈庫)라 불렀다.

진상(進上)에 관련된 기관으로 내섬시 내자시 사도시 사재감 사포서 등과 더불어 공상육사(供上六司)에 포함됐으며 후추는 왜상(倭商)을 통해 수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백성들 사이에선 콧구멍을 의영고라 불렀다고 한다. 과거(科擧)보러 가는 수험생들이 콧구멍에 각종 비밀(커닝 페이퍼)을 숨겨갔기에 비아냥으로 나온 말이다.

당시 수험생과 관리들이 부정한 수법으로 시험을 치르고, 당락을 결정하니 과거제 자체가 흔들리고 나라의 기강이 무너졌다고 한다. 이를 보면 커닝의 역사는 기록상 600년 이상으로 꽤나 오래돼 예나 지금이나 골칫거리이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우리 사회에서도 커닝이 만연하리 만큼 중대한 문제로까지 등장했다. 10명중 2명꼴로 커닝경험이 있다는 조사가 있을 정도이고, 휴대폰이나 문자메시지 등 첨단의 방법이 동원되는 등 다양한 수법이 등장하고 있다.

대입수능시험장에서의 협박 커닝, 고교에서의 내신성적 올려주기를 위한 교사들의 커닝 묵인, 경찰승진시험·의사자격시험에서의 커닝 등에서부터 약 10여년 전에는 대구의 모 대학 수석합격자가 커닝을 했다는 충격적인 보도도 있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대학생들 스스로 '커닝으로 얻은 학점, 커닝으로 버린 양심'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커닝 안하기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아주대는 제자들의 양심을 믿는다는 전제 아래 대학에서는 보기 드믈게 감독 없는 시험을 치르기로 해 화제가 된 적도 있었다.

최근 실시된 예비변호사들의 윤리시험에서 50여명이 커닝한 사실이 드러났다는 보도로 법조계의 '도덕 불감증'이 다시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예비변호사들이 윤리시험을 치르면서 비윤리적인 행위를 한 것이다.

책을 펴놓고 보는 '오픈 북' 방식으로 치러진 시험인데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답안이 속출했다면 틀림 없는 커닝 행위로밖에 볼 수 없다. 여하튼 시험이라는 것은 학생신분이건, 사회적 지위의 높고 낮음이건 간에 관계 없이 수험생의 입장에서 보면 커닝이 뒤따르는 골치아픈 존재다.
〈李俊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