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22대 임금 정조대왕(1752~1800)은 효(孝)와 문화(文化)의 군주로 통한다. 그 만큼 이것에 얽힌 일화도 수없이 많다. 7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 장헌세자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당쟁의 제물이 되어 뒤주 속에 갇혀 죽는 장면을 목도했다. 24세인 1776년에 즉위한 이후 문민화 정책을 펼치고 당쟁을 없애려는 탕평책을 쓴다. 오로지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는 것이다.
정조는 1789년 원소(園所)도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으로 옮긴다. 그 뿐 아니다. 실학자 정약용으로 하여금 화성을 축성케 한다. 수원 천도까지 결심할 정도로 수원에 대한 사랑은 극진했던 것이다. 유네스코의 380번째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은 한국 성곽의 백미로 통한다.
화성 건축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에 의하면 공사에 참여한 인부들의 이름과 노임까지 기록됐을 정도로 정조의 애민사상을 엿볼 수 있다. 당시 물가로는 모두 87만냥이고 현재 화폐로 400억원이다. 화성건축을 통해 이 많은 돈을 백성들의 손에 쥐어주어 사실상 최초로 공공근로를 했던 셈이다. 그만큼 백성을 사랑했고 문화유산에 애착을 가진 임금이었다.
정조의 화산릉 참배 때 머물 화성행궁도 팔달산 동록(東麓)에 지었다. 능행차를 하면서 백성들로부터 상언(上言)을 들어 5천건의 억울한 일을 해결해 주기도 했다. 한양을 오가는 길 이목리에 이르면 노송지대의 송충이까지 입으로 죽였다. 아버지 산소 가는 길의 해충을 없애기 위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지지대(遲遲臺)에 이르러서는 장헌세자의 묘소를 놓고 가기가 싫어 걸음을 지연시켰다 해서 지지대로 이름붙여졌다. 수원을 효원(孝園)의 도시로 부르는 이유다.
화성에 이어 화성행궁이 최근 복원공사를 끝냈다.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도 열었던 곳이다. 조선 8도의 7만5천여명 노인들에게도 같은 혜택이 돌아가도록 했을 만큼 정조는 효심이 지극했다. 요금을 내지 않는 노인들이 전철과 버스에서 푸대접을 받고 있는 요즘이다. 사람은 나이 들면 누구나 노인이 된다. 화성행궁 복원을 계기로 수원 전체가 효(孝)의 산 교육장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李俊九(논설위원)
정조(正祖)와 孝
입력 2003-03-15 00:00
지면 아이콘
지면
ⓘ
2003-03-15 0면
-
글자크기 설정
글자크기 설정 시 다른 기사의 본문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가
- 가
- 가
- 가
-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