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화의 한국사이야기에 보면 조선시대 벼슬아치 선발시험인 과거(科擧)의 부정행위 수법을 세 가지로 열거했는데 그중 하나가 대필(代筆)이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과거를 보면서 부정행위자가 미리 내통한 자의 글을 베끼고 그 내통한 자는 시험지를 내지 않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같은 부정행위가 발각돼도 처벌이란 것이 합격취소나 다음 응시자격 제한 정도로 너무도 가벼웠다는 점이다.

조선왕조가 관료사회였던 점을 감안한다면 정체(政體)의 근간을 허무는 행위인 만큼 주리를 틀고 치도곤(治盜棍)을 안겨도 모자랄 법한데 요즘으로 치면 '훈방' 정도로 처리한 셈이다.

남의 지식과 학문을 돈으로 사는 행위에 이렇듯 관대했던 것도 이어가야 할 정신문화유산인지, 현대의 후손들은 선악을 따지는 자체가 무색할 정도로 '대필 전성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박사학위 500만원, 석사학위 300만원을 받고 인터넷에서 학위논문 대필장사를 하던 사람들이 적발됐다고 한다. 대필 가격을 놓고 '깎자, 안된다' 흥정을 했다는 후안무치도 그렇고, 학사가 써준 석사학위 논문을 버젓이 통과시킨 '대학원'은 또 뭐하는 곳인지 알 길이 없다.

석·박사 논문뿐인가. 선거철이 되면 연설문 작성을 발주하는 정치인, 대입시험과 취업을 위해 자기소개서를 구매하는 젊은이들로 '대필 사업'은 산업화 된지 오래다. 그 결과일 게다. 초등학생들도 회장·반장 선거에 쓸 연설문을 대필업자에 맡기고 있다니 말이다.

이러다가 우리 사회가 온통 대필사업자들의 교언영색으로 포장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자신의 생각과 학문, 사상을 스스로 글과 말로써 표현할 수 없다면 그것이 바로 문맹(文盲) 아닌가. 개인의 창의성과 집단의 다양성이 만개한 21세기에, 한국땅에서는 거대한 문맹시장이 형성되고 있으니 문명의 반동(反動)이자 퇴행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사회의 양식과 도덕성만으로 신(新) 문맹을 퇴치할 수 없다면 타율로라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대필산업을 척결하지 않고서는 문화와 문명을 열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옛날 문자를 몰랐던 촌로들도 대필자에게 글만 빌렸지 생각까지 빌리지는 않았는데…, 참으로 개탄할 세상이다./윤인수(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