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당 정권기인 1957년 8월 말, 신라의 고도(古都) 경주경찰서에 일대 경사(?)가 났다. 소위 왕세자 이강석이 왕림한 것이다. 이강석이라면 당시 무소불위 권력을 누리던 자유당의 제2인자 이기붕의 아들이자, 왕정시대 임금에 버금가던 대통령 이승만의 양자이다.
그야말로 ‘귀하고 귀하신 몸’이다. “영감님께서 여기까지 와주셔서 소인 한평생의 영광입니다.” 서장은 시장·군수와 더불어 온갖 극존칭을 써가며 지극정성으로 대접했다. 그 덕에 초호화판 경주관광을 마친 왕세자는 이웃 영주경찰서에 가서도 못지않은 칙사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왕세자의 호강은 기껏 사흘을 넘기지 못했다. 아쉽게도 이강석의 진짜 얼굴을 알고 있던 도지사에 의해 너무 일찍 가짜임이 들통난 것이다.
가짜 이강석은 그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언젠가 이강석이 헌병의 뺨을 때리는 등 행패를 부리는데도 되레 맞은 쪽에서 절절매는 걸 보고 흉내 내본 것이다”고.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고도 한다. “권력이 그렇게 좋은 것인 줄 비로소 알았다.”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한편의 코미디라 하겠지만, 당시의 독재정치와 권위주의의 부패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충분히 짐작케 해주는 사건이었다.
그 후로도 비슷한 권력층 사칭 사건은 얼마든지 있어왔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현직 장관의 조카라고 으스대며 수백억원을 부정대출 받았다가 들통난 인물이 있었고, 기막힌 속임수로 1천억원에 가까운 돈을 주무르던 사기의 귀재(?)마저 청와대 과장을 사칭한 청소직원에게 거액을 안기며 청탁해온 코미디도 벌어졌었다. 그때는 분명 독재와 권위주의의 대명사로 불리던 자유당이나 군사정권 시절도 아니었다.
최근 청와대 참모진을 사칭한 사건이 잇달아 발생, 청와대가 자체 진상조사에 나섰다는 소식이다. 대통령 핵심측근을 사칭하며 일부 공기업 및 산하단체장에게 이메일 요청을 한 인물이 있었는가 하면, 청와대 비서관을 사칭해 통관 과정에서 압력을 행사한 인물도 있었다는 것이다. 시대변화를 읽지 못하는 인물들이 아직도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도 틈새가 엿보이는 것인지…./박건영(논설위원)
지금도 틈새가…
입력 2003-03-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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