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을 한순간에 파괴시킬 만한 위력을 지닌 질병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궤(軌)를 같이하고 있다.

이미 고대 이집트의 미라에서 폐렴 임질 홍역 나병 말라리아 결핵 암 등의 세균이 조사결과 나타났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준다. 질병이 하나의 문명을 파멸로 몰아넣기도 하고 그로 인해 새로운 문명의 싹을 틔우기도 한다.

고대 그리스 문명의 쇠퇴가 아테네를 휩쓴 역병 때문이고 로마제국의 몰락 뒤에는 페스트와 천연두라는 당대로서는 희귀의 괴질이 있었다. 러시아를 원정했던 프랑스군 가운데 3분의 2를 희생시킨 발진티푸스가 없었더라면 나폴레옹은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문명과 질병의 관계는 역사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공룡의 화석에서조차 뇌막염을 앓았던 흔적이 발견돼 어쩌면 질병은 지구의 역사보다도 더 오래된지도 모른다.

21세기의 괴질이라 불리는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이 출현한지 2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확실한 원인균을 발견하지 못한 이즈음 우리는 급성호흡기증후군(SARS)에 또다시 시달리고 있다. 전 세계는 또 하나의 괴질 공포에 휩싸이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11월 중국남부 광둥성에서 처음 발생해 기침을 동반한 고열과 감기증상 비슷하게 보이는 이 괴질은 지금 홍콩·싱가포르·태국을 거쳐 유럽으로, 미국·캐나다 등 전 세계 27개국으로 급속히 번지고 있다. 현재까지 감염자만 2천325명, 사망자가 80명을 넘는다.

광둥성의 같은 호텔에 묵었던 홍콩 손님들이 발병한 것으로 보아 접촉없이도 전염이 되는 공포의 질병이다. 다행스럽게 아직 우리 나라에서는 환자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결코 안전지대는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조류에 의해 전염된 것으로 추정할 뿐 괴질의 정확한 실체가 파악되지 않은데다 예방법조차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저 해외여행을 자제하고 다중집합시설 출입을 삼가며 손을 잘 씻으라는 기본수칙의 당부밖에 없다.

저 바다 건너 이라크에서는 전쟁이 한창이다. 전쟁이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닐진대 괴질도 물론 남의 일이 아니다. 인간을 복제하는 21세기 초문명시대에 살면서도 이 신종 괴질의 정체를 밝히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이준구(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