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시인' 천상병의 생전 꿈은 내 집 하나를 갖는 소박한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걸레스님' 중광이 찾아와 20만원이라는 평생 처음 만져보는 거금을 주고 간다.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돈이라도 생긴 것처럼 좋아하다가 아내가 담배를 못 피우게 하자 거금(?) 20만원으로 호텔 하나를 사서 나가겠다고 터무니없는 떼를 쓴다. 그래서 아내가 이혼하자고 했더니 대통령에게 당연히 허락을 받아야 한다며 이혼장 밑에 '대통령 귀하'라고 쓴 천상병이다.
가난 무직 방랑 주벽(酒癖) 기행(奇行)의 대명사였던 천상병(千祥炳·1930~93)은 하루 담배 한 갑과 버스비만으로도 행복했던 시인이었다. 폭음과 줄담배와 끝없는 방랑, 남들이 다 입는 양복 대신 언제 세탁했는지도 모를 구질구질한 군복과 일그러진 얼굴, 비뚤어진 걸음걸이, 남의 이목을 가리지 않는 경천동지(驚天動地)의 박장대소(拍掌大笑) 등 소박하다 못해 기인(奇人)의 행동을 보였다. 그가 죽고 나서도 웃지 못할 일이 있었다.
의정부 자택에서 장례를 치른 유족들은 각계에서 보내온 조의금 850만원을 협소한 집안에 둘 데가 없어 고민하다가 천씨의 장모가 서류봉투에 넣어 빈 아궁이 속에 감춰놓았다. 이 사실을 모른 미망인 목순옥씨가 아궁이에 연탄불을 피워 그만 다 태워버렸다. 다행스럽게 한국은행은 형체가 분명한 450만원을 새 돈으로 바꿔주었다. 저승길에서나마 400만원의 노잣돈을 가져간 그였다.
천상병의 미발표작 '달빛'이 최근 발굴됐다는 소식이다. “밤은 깊어만 가고달빛은 더욱 교교하다일생동안 시만 쓰다가언제까지 갈 건가/나는 도저히 모르겠다”고 적었다. 부인 목순옥(65)씨가 집안살림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이 시는 1987년 작품으로 이승의 삶을 돌아보며 저승을 넘본다는 점에서 '귀천(歸天)'과 더불어 쌍(雙)을 이루는 절명시(絶命詩)로 평가된다.
오는 28일 10주기를 맞아 21일부터 5월31일까지 의정부 예술의 전당 등지에서 추모전이 마련된다. 평화주의자이자 낙천주의자로 불리는 천상병이 갑자기 그리워지는 것은 각박해지는 우리 사회에서 잃어버린 고향처럼 느껴지기 때문은 아닐까./이준구(논설위원)
시인 천상병
입력 2003-04-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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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4-17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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