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마(靑馬) 유치환과 정운(丁芸) 이영도의 '플라토닉 러브'는 한국문단을 한결 풍성하게 한 유명한 사건이다. 통영여중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피끓는 유부남 청마와 꽃같은 청상(靑孀) 정운.

둘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청마는 정운의 마음을 얻기 위해 5천여통의 연서(戀書)를 통영우체국에서 부쳤다. “…사랑하는 것은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청마의 시 '행복'은 지금 통영우체국 앞 시비로 남아 불멸의 사랑, 천년지애(天年之愛)를 노래하고 있다.

모바일 커뮤니케이션 세대는 '편지'라는 단어 자체를 고리타분하게 여기겠지만, 그것이 인정을 소통시키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던 시절이 불과 얼마 전이었다. 군에 간 아들이 보낸 첫 병영편지는 이땅의 모든 어머니에게 여전히 최루탄보다 강력한 최루지(催淚紙)이다.

그러나 요즘 우편함은 사람들을 소통시키는 편지보다는 답장이 필요없는 고지서와 광고물로 채워지고 있다.정보통신부 통계에 따르면 99년 38억2천만통이었던 우편물량이 2002년에는 55억3천만통으로 늘어났는데, 광고우편의 급증때문에 빚어진 가파른 상승세라고 한다.정운은 답장을 하고 싶어도 못했건만 현대인들은 답장할 데 없는 우편물의 홍수에 시달리고 있으니 비극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국민 전 상서'는 그래서 신선하다. 호시우행(虎視牛行), 호랑이처럼 보고 소처럼 걷겠다는 개혁 출사표도 그럴듯하고 국가와 국민 걱정에 노심초사하는 '대통령 노무현'의 인간적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대통령 전용 별장청남대를 국민에게 돌려주기로 한 그날 어둑새벽에 '개인 노무현'과의 결별을 선언하며 '대통령의길'을 걷겠다는 약속을 적어내려가는 엄숙한 장면을 상상해 보면 자못 감동적이다.

이에 영감을 받았던 것일까.'영원한 농구황제'마이클 조던이 20일 미국 주요일간지 광고란에 자신의 인새이었던 '농구 경기에게' 작별이자 새로운 시작을 고하는 편지를 남겼다고 한다. 양(洋)의 동서를 초월해 편지의 힘을 예찬하는 사례로 오래 기억되기를 바란다./윤인수(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