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첨단 문명시대를 살고 있다. 전화 한 통만 하면 빈 집에 불이 켜지고 아예 저녁밥까지 할 수 있는 세상이다. 이동통신은 또 어떤가. 20년 전인 84년 카폰이라는 것이 등장했다.
당시 가격은 250만~300만원으로 웬만한 집의 전셋값이었다. 지금 같으면 그런 무전기 같은 것을 어떻게 쓰냐고 하겠지만 특권층만의 전유물로 자동차에 카폰 안테나가 달려 있으면 검문도 피해갈 수 있다는 얘기도 들렸었다. 92년부터 보급된 휴대전화는 현재 3천286만명이 갖고 다닌다.
97년까지는 삐삐(무선호출기)의 전성기가 있었다. 이동전화 사기는 비싸고 해서 틈새시장으로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가입자가 1천400만명을 웃돌 만큼 넘쳐났던 삐삐는 지금 다 어디로 갔을까. 10대들은 아예 삐삐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80년대부터 기자생활을 했던 사람들은 물론 삐삐에 대한 남다른 추억들이 많다. 데스크나 출입처 기자실로부터의 호출에 차례로 전화를 걸어 확인해야 했다. 연인들은 친구의 음성메시지를 들으려고 공중전화 앞에 장사진(長蛇陣)을 치던 추억도 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때는 건물더미에 묻혀있는 사람들의 위치파악에 쓰이면서 효자(?)노릇도 톡톡히 했다.
그러나 요즘 들어 휴대전화에 밀려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는 디지털 테크놀러지는 이러한 기계들을 금세 골동품으로 만들어버리고 만 것이다. 백화제방(百花齊放)하던 서비스 업체도 거의 사라져 이제 수도권 이외에서는 서비스도 안되고 1년 전부터는 지하철에서도 수신이 안된다.
그런데 요즘 들어 삐삐를 다시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신세대 사병들이 입대하면서 가입한다. 소지는 안되지만 영내에 공중전화가 있어 언제든지 애인이나 집으로부터 날아온 정겨운 음성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직업상 수술이 많은 의사들이나 휴대폰 요금에 부담을 느낀 사람들도 삐삐를 다시 찾는 경우도 있다. 아직도 12만명 정도가 가입돼 있다. 문명의 급속한 발전 속에서도 삐삐가 아직 퇴출되지 않는 것은 호출을 받고 전화를 할 동안 기다릴 수 있는 마음의 여유 때문은 아닐까./이준구(논설위원)
'삐삐'와 문명
입력 2003-04-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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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4-26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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