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가 지배하는 21세기를 사는 현대인에게 '대기만성'은 체감불능의 금언이다. 대기(大器)의 싹이 보여도 조성(早成)을 시켜야 할 판에, 소기(小器)의 자질로 만성(晩成)의 가능성을 꿈꾸기란 아예 불가능한 세상에 살고 있는 탓이다. 세태와 제도 탓에 무수한 대기(大器)들을 생매장 중인 우리는 '대기 불임(不姙)시대'를 살고 있는 셈이니 안타까울 뿐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화단을 기름지게 한 두 대가, 내고(乃古) 박생광(朴生光)과 통영 사람 전혁림(全爀林)은 대기만성의 빛나는 사례다.
1904년 태어난 내고는 지난 84년 팔순 기념 개인전 한번으로 한국 화단을 발칵 뒤집어 놓은 장본인. 불교, 무속, 역사 등 가장 한국적인 주제들을 강렬한 색채로 형상화해 낸 그의 작품은 귀기(鬼氣)가 느껴질 정도다. 한국의 기성화단은 그의 채색에 질려 일본풍이라며 폄훼했지만, 프랑스 미술가협회장인 아르노 도트리브는 첫눈에 그의 작품의 진가를 인정하고 85년 파리 전시를 직접 개최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고는 파리 전시회 직전 사망했으니 애석할 뿐이다. 반면 1916년생인 전 화백은 지금도 짱짱하게 화업에 몰두 중인 현역이다. 통영 앞바다의 물빛을 상징하는 코발트 블루를 즐겨 사용하는 그도 지금이야 한국 색채추상의 대가로 존경받고 있지만 그의 생애 대부분은 지방화단의 무명화가였다. 지난 11일에는 통영에 자신의 미술관을 개관하는 경사가 있었다.
그런데 두 대가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곳이 바로 용인시 영덕리에 있는 '이영미술관'이다. '명성황후'를 비롯 소꿉친구였던 청담대종사와 각별한 사이였던 큰무당 김금화를 소재로 한 내고의 대작들이 시선을 압도하는 곳이다.
전 화백은 아예 이곳에서 머물며 작업을 했을 정도였는데 수많은 대작과 남다른 애정을 남겨놓았다. 모두 김이환 관장이 두 대가와 맺은 인연과 그들에게 쏟은 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同事), 즉 사섭행(四攝行)이 빚어낸 결과이다.
묘한 것은 이영미술관 또한 김 관장이 평생 품어온 염원을 예순이 훨씬 넘어 실현시킨 만성형 대기(大器)이자 보고(寶庫)라는 점이다. '만성한 대가'들의 예술혼과 집념이 빚어내는 감동을 체험하기에 이만한 곳이 없지 싶다./윤인수(논설위원)
이영미술관
입력 2003-05-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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