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하면 떠오르는 게 화성(華城)이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성을 쌓으면서 새로운 도시로 건설했다.
우리 나라 최초의 신도시였던 셈이다. 수원성은 1794년부터 2년 반 걸려 미국이 독립한 해인 1796년 완성되었다. 정조 때였다.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측은한 마음을 품고 아버지 묘를 명당의 자리로 모시고자 후보지로 수원 고을 뒷산(지금의 화성시 태안읍 화산리)이 물색됐고, 기존의 수원은 현재의 위치인 팔달산 아래로 옮긴다는 계획을 세웠다.
왕의 효성심 때문이라는 것이 이유였지만, 부왕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고 신도시를 건설하려는 데는 숨은 뜻이 있었다. 왕권 확립을 위해서는 기득권 세력을 누르고 신진 세력을 기용하여 신하의 세력이 한쪽으로 불거지지 않도록 해야 했고, 재정적 뒷받침과 군사력도 필요했다.
그러나 기존의 한양에서 이 모두를 새로이 얻기는 어려웠다. 시대를 앞서간 신도시 건설의 발상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왕의 의지 아래 탄생됐다. 사도세자 묘 이전에 따라 새로운 장소로 이전하게 된 수원은 과거의 수원읍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큰 규모로 변모되기 시작했다.
한양 다음의 대도시 서열에 올라 광주부에 버금가는 도시가 되었다. 행궁을 중심으로 성을 쌓고 종로를 만들어 민가와 상가를 재배치한 도시로 조성했다.
31세의 젊은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우리의 성과 중국 그리고 유럽 성의 장·단점들을 고려하여 성의 둘레와 높이 등 성벽의 규모와 성벽을 쌓을 재료를 정하고, 축성 과정에 있어서 전혀 새로운 차원의 개념을 시도하였다.
작업과정에서 현장감독에서 인부들에 이르기까지의 사람 이름과 작업일지 등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공사실명제가 이미 이뤄졌던 것이다. 처음으로 '공공근로'를 도입, 고용창출의 효과도 보았고 일정한 작업량에 따라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성과급제도 실시했다.
화성과 수원신도시 건설의 일지인 '화성성역의궤'를 보면 당시로서는 모든 것이 꽤 앞서간 계획들이었다. 최근 파주와 김포 신도시 건설계획을 보면서 200여년 전의 계획도시처럼 꼼꼼하고도 쾌적한 자족도시로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이준구(논설위원)
최초의 신도시 수원
입력 2003-05-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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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5-15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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